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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의 고향<168>영광 김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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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영광김씨의 시조는 고려 성종∼현종대의 명신 김심언. 신라 경순왕의 네째아들 은세의 손자로서 일찌기 문과에 급제, 벼슬이 내사시낭평장사에 이르렀다.
금심언은 어려서 고려의 석학 최 섬의 문하에서 배우고 훗날 그의 사위가 되었다. 『고려사』 는 최섬이 김심언을 사위 삼게된 내력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하루는 최 섬이 꿈을 꾸었는데 금심언의 머리에서 불이나 불길이 하늘로 치솟았다. 최 섬은 김심언이 필시 큰 인물이 될것이라고 믿고 사위로 삼았다.』
그는 현종 5년에 예부상서가 되었으며 이등해 수국사로 임명되어 7대왕조실록을 편찬하기도했다. 이어 내사시랑 평장사에 올라 오성 (현 전남영광) 군에 봉해졌다. 이를 인연으로 후손들이 영광을 관향으로 삼았다.
현종9년 (1018년) 에 세상을 뜨자 왕은 그의 죽음을 애도, 3일간 조회를 폐하고 문안공의 시호를 내렸다한다. 오늘날 후손들은 김심언을 무관 강감찬장군과 쌍벽을 이루는 당대의 명신이었다고 평하고 있다.
김심언의 후손은 대대로 고려의 중신으로 활약했다.
그의 아들 윤보는 삼중대광판소부사사를 지냈고 손자는 문종때 한림학사를 거쳐 문하시랑동중서평장사에 올랐다.
김극검 (숙종·대자소수), 김영부(중서시낭평장사경 판병부사) 등도 그의 후손들.
고려때 김심의 후손들은 대대로 벼슬에 올라 개성 서쪽에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는데 특히평장사를 많이 배출했다해서 사람들이 이 마을을 평장동이라고 불렀다한다.
1170년 정중부가 반란을 일으켜 의종을 페하고 문신들을 살육한뒤 무단정치를 시작했다.김심언이후 융성을 구가하던 영광김씨는 이 정치적 격변의 회오리속에 휘말려 내리막길을 걷는다.
대표적인 희생자는 김심언의 6대손자인 김보부. 당시 동북면병마사였던 그는 의종을 복위시키고자 군사를 일으키는 한편, 한호국을 시켜 거제도에 유배된 왕을 경주로 모셔다 대기토록 했다. 그러나 이같은 모의가 사전 발각되어 의종은 이의민에게 살해당하고 보부 또한 잡혀 처형됐다.
이 사건으로 영광김씨 일문중 특히 문신들은 처절한 정치적 보복을 당했다.
이같은 멸문의 위기속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소수의 생존자들은 전국 각지의 첩첩산골로 흩어져 혈맥을 이었다.
영광김씨는 이시기에 6개파로 나뉘어지는데 경파·장흥파·영광파·고창파·강계파·은율파가 그것이다.
경파는 고려 충렬왕때 중낭장을 지낸 김정부를 중시조로 받들고 있으며 후손들이 파주군·화성군·홍성군 일대에 밀집해 살고있다.
장흥파는 같은 시기에 공조전서를 지낸 김태용의 후손들로 현재 장흥군 일대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충렬왕때 판도판서를 지낸 김연을 중시조로 받드는 영광파는 영광군·정주군일대에, 공민왕때 내사시랑을 지낸 김사경을 중시조로 받드는 고창파는 고창군일대에 모여 살고있다.
영광김씨는 북한의 강계와 은율등지에도 많다. 강계파의 중시조는 예부상서 김문경. 은율파의 중시조는 김석공이다.
조선조에 들어 영광김씨 문과급제자는 20여명. 그러나 이들 대부분은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초야에 묻혀 음풍영월로 살았다. 김보부사건이후 정치권력의 무상함을 뼈저리게 느꼈던 탓이다.
그러나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는 살신성인의 각으로 구국의 전장에서 싸우는 전통도 굳건하게 이어졌다.
충숙왕을 모시고 원나라에 갔다가 왕의 신변에 위험이 다가오자 자신의 몸으로 왕을 호위한공으로 상호군에 제수된 김간보, 공민왕때 홍건적의 난을 평정, 병부상서에 오른 김사순등은 그중에도 대표적인 인물들.
김해은 조선 태종때 문과에 급제, 보공장군대호군으로서 대마도왜구 토벌에 출정했다가 순절했다.
김찬 (홍문관전한) 과 김관 (이조참판) 등 형제는 태종∼세종대의 명신들. 이들은 세종대에 각각 문과에 급제, 삼도의 관찰사등 요직을 지냈으나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이에 반기를 들고 고향인 장흥으로 낙향한 절신들이다. 오늘의 장흥파는 이들 후손들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김개(중종·현감), 김광원(문장)등도 빼놓을수 없는 인물.
김광원은 조광조의 문인으로 가마시에 합격하고 문장과 학식이 뛰어났으나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해남으로 유배되었다.
후에 사면되어 장흥에서 후진양성에 여생을 보내니 사람들이 그를「호남사표」라 했다.
김여중은 임난 공신의 한사람. 그는 생진량시에 합격한 학사였으나 전쟁이 발발하자 의병을 모아 진주전선에서 활약했다. 또 군량미 3백석을 모아 의주행재소로 보내니 선조가 크게 탄복, 좌찬성을 제수했다. 그러나 이를 사양하고 낙향했다가 정유재난이 발발하자 다시 군대를 이끌고 이순신장군의 참모가 되어 활약했다. 그의 호 「헌헌헌」 은 선조가 하사한 것.
한일합방때 울분을 참지못해 단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김종는 영광김씨 일문의 열사중 한사람.

<저명 인사>

<종친회제공, 무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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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차례는「청주정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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