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박 대통령, 권력 미련 버리고 결단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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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시인 조병화는 아마 한국의 가장 짧은 시인 ‘천적(天敵)’에서 이렇게 썼다. “결국, 천적은 나였던 거다.” 박근혜 대통령은 자신이 저지르고 최순실이 배후에 있던 권력 사유화 사건과 그 후의 국민 저항 사태를 보면서 조병화의 시를 가슴에 새기길 바란다. 문제는 최순실이 아니고 대통령 자신이었다. 돈과 권력과 자리를 온통 최순실 일가가 해쳐 먹은 것보다 허망한 건 유권자 한 표, 한 표로 몰아준 신성한 국가 권력을 저렇게 톡 털어서 탐욕스러운 민간인에게 통째로 넘겨준 황당한 주권 재위임 행위다.

청와대서 의사결정 못하고 미적댈 때
김무성 “탈당하라”…하야 요구 거세져
강제 선택당하기 전에 국회에 맡기길

최순실에게 판단력을 저당 잡힌 대통령의 정신구조가 지금이라고 해서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박 대통령이 요새 무슨 국가 원로와 종교 지도자를 만나고 있지만 그들이 무슨 고언(苦言)을 해도 본인의 판단력이 작동하지 않으면 다 헛일이다. 자신의 과거 습관과 태도, 인맥을 적과 싸우듯 다 쳐내야 세상의 옳은 이야기가 귀에 들어오는 법이다.

세상은 한목소리로 박 대통령에게 요구하고 있다. 여야 3당에 새 총리를 지명해 달라고 요청하고 ‘국회 추천 새 총리 후보’가 등장하면 본인은 국정 2선으로 후퇴하겠다는 선언을 하라는 것이다. 이와 함께 대통령을 망치는 데 공범이었던 새누리당 친박 지도부를 내려치라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박 대통령은 탄핵이나 하야, 조기 대선 같은 불확실성에 빠져들지 않고 최소한의 헌법적 지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선택은 가능한 한 헌법·의회 시스템에서 해법을 찾으려는 많은 사람의 노력에 부합한다.

문제는 이런 답이 제시돼 있는데도 박 대통령이 여전히 딴 생각, 딴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박 대통령은 심지어 청와대 보좌진의 상당수를 포함해 정부, 여당, 그에게 표를 던졌던 숱한 보수 유권자까지 이 해법을 지지하고 있는데도 미적거리고 있다. 무슨 미련이 그렇게 남은 것인가. 탈당 얘기만 해도 진작 김병준 총리 지명자가 주장했고, 어제는 김무성 전 대표가 가세했다. 스스로 내려야 할 결정을 미루면 남의 결정을 따라야만 하는 게 권력의 생리다. 박 대통령은 우병우의 사퇴는 없다고 고집을 피우다 최순실 사건을 맞았고, 최순실 사건이 터지자 허겁지겁 사과를 두 차례나 했지만 억지 춘향식 찔끔 조치만 내놓다 세 번째 사과를 해야 하는 지경에 떠밀리고 있다.

박 대통령이 이번에도 세상이 다 아는 수순과 해법을 늦추면서 주말을 맞을 경우 백약이 무효가 될 것이다. 버스 떠난 뒤 손 흔들고, 숨 끊어지고 심폐소생술 하면 뭐하나. 지금은 해법과 수순을 따지는 것조차 한가할 뿐이다. 중·고등학생을 포함한 남녀노소가 광화문광장과 전국의 주요 도시에 모여 한마음으로 촛불을 들었던 민심은 대통령을 마음에서 지운 상태다. 이대로 버틸 경우 어느 누구도 불붙은 민심의 분노를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을 맞을 것이다. 이제는 권력을 향한 미련과 집착을 버리고 국가와 국민을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헌정 중단을 막을 수 있다. 대통령의 마지막 결단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