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이철호의 시시각각

정신과 의사들이 보는 최순실 사건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0면

이철호
이철호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기사 이미지

이철호
논설실장

하루하루 상상 그 이상의 기막힌 일들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 영화 ‘곡성’의 무당굿이나 ‘검은 사제들’의 퇴마 의식은 저리 가라다. 영생계·팔선녀·오방낭 같은 샤머니즘 용어들이 실시간 검색 순위 1위다. 부끄러운 시절이다. 드디어 ‘최순실 게이트’에 호스트바 선수까지 등장했다. 막장 드라마답게 대사들도 지저분하다. “능력 없으면 부모를 원망해.” “지금까지 언니(박근혜 대통령) 옆에서 의리를 지켰더니 이만큼 대우 받잖아.” 아주 골고루 국민의 속을 긁어놓는다. 이 땅의 20대는 딸 정유라로 인해 열을 받고, 중년 아줌마들은 천박한 최씨 때문에 분노한다.

솔직히 어디까지 대통령을 믿어야 할지 모두가 멘붕이다. 박 대통령은 “누구에게 조종받는다는 것은 내 인격에 대한 모독” “청와대 문서 유출은 국기문란” “(문고리 3인방에 대해) 의혹을 이유로 내치면 누가 내 옆에서 일하겠느냐”고 해왔다. 이 모두가 거짓말로 드러났다. 저마다 “하늘도 속고 국민도 속고, 나도 속았다”며 소름 끼치는 표정이다. 대통령의 “꼼꼼하게 챙겨보려던 순수한 마음”이라는 해명도 가슴에 와닿지 않는다. 아무 소용이 없다. 오히려 우리 사회는 “박근혜가 최태민 부녀에게 완전히 지배당했다”는 괴소문을 믿는 분위기다. 전여옥 전 의원의 증언도 다시 주목받고 있다. “박근혜는 심기를 거스르거나 나쁜 말을 하면 절대로 용서 않는다. 그가 용서하는 사람은 딱 한 명, 자기 자신뿐이다.”

지난 주말 이틀간 대한신경정신의학회가 광주광역시에서 학술대회를 열었다. ‘600만 명 우울증 환자의 치료법’이 주제였다. 하지만 전국에서 모인 정신과 의사들은 귓속말로 ‘최순실 게이트’를 주고받기 바빴다. 그들의 분석은 대개 이러했다. “예민한 시기인 11~27세의 청와대 생활이 박 대통령의 자기애(나르시시즘)를 과도하게 키운 듯싶다. ‘우리 애를 특별 대우하지 말라’고 단속했던 육영수 여사의 서거 뒤엔 누구도 쓴소리를 하지 못했다. 자기애가 너무 강하면 달콤한 말에 쏙 빠지고 귀에 거슬리는 충고엔 화를 낸다. 부모님들의 비극적이고도 충격적인 서거도 엄청난 트라우마를 남겼을 것이다. 공포와 배신감에 사로잡히면 ‘패러노이드(과도한 의심)’에 빠지기 쉽다.”

“더 주목할 대목은 1980~98년 장기간의 칩거다. 오카다 다카시의 『심리를 조작하는 사람들』에 따르면 혼자 고립된 상황에서 강한 카리스마를 가진 인물이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메시지를 주입하면 심리 조작이 이뤄진다. 스스로 행동할 수 없는 수동적 상태에서도 본인 의지로 주체적인 선택을 했다고 믿게 만드는 것이다. 이미 ‘(모순된 메시지를 무의식적으로 던져 거절하지 못하게 하는) 더블 바인드 기법’이나 ‘(정보와 환경을 통제해 생각과 행동을 몰아가는) 터널효과’ 등은 광고와 마케팅에 활용되고 있다. 인간 심리는 완벽하지 못하다. 미국의 유명인사인 톰 크루즈나 존 트래볼타조차 신비주의 신흥종교에 빠진다. 심리 조작은 초자연적 현상이 아니라 과학에 기반한 팩트다.”

박 대통령의 지지율이 17%로 곤두박질했다. 사실상 정치적 뇌사 상태다. 우리 사회 한쪽에선 위기에 몰린 사건 연루자들의 극단적 선택이나 남북 관계의 끔찍한 변고까지 걱정할 정도다. 어쩌면 이번 사태는 사회과학보다 정신분석학적 접근에서 해법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정신과 전문의들은 한결같이 “대통령이 투명하게 진실을 밝히고 우리 사회가 시스템적으로 움직인다는 확신을 줘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책임총리나 거국내각은 그 다음 문제다. 돌아보면 이명박 정부의 마지막 1년도 김황식 총리, 김관진 국방부 장관, 김석동 금융위원장 등이 버텨주었다. 모두 친이(李)계가 아니라 후(後)순위로 낙점된 인물들이었다. 대한민국은 결코 나약하지 않다. 지난 50여 년간 민주화되고, 다원화되고, 기초체력도 튼튼해졌다. 기업과 근로자·공무원들이 곳곳에서 묵묵히 떠받친 덕분에 외환위기를 이겨냈고 5번의 레임덕도 무사히 건너왔다. 이제 박 대통령이 어둠 속에서 밝고 환한 길로 나왔으면 한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저력을 믿어야 한다.

이철호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