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분노한 시민 ‘순실봇’ ‘이게 나라냐’ 피켓 들고 경찰과 충돌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503호 3 면

시민들이 29일 오후 서울 종로구 청계광장에서 열린 ‘모이자 분노하자 내려와라 박근혜’ 촛불집회에 참가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집회를 끝낸 참가자들은 종로를 거쳐 북인사마당까지 행진을 했으며 광화문광장 세종대왕 동상까지 진출해 경찰과 대치했다. 강정현 기자

29일 오후 6시 서울 청계광장. 전날 같은 시각보다 7도가량 떨어져 영상 10도를 밑도는 가을추위가 닥쳤지만 시민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날 오후 5시부터 모여들던 시민들은 곧 청계광장 입구에서 200m가량 떨어진 모전교까지 거리를 가득 메웠다. 1시간 만에 모여든 인파는 집회 측 추산 2만여 명(경찰 추산 9000명)으로, 2014년 5월 세월호 참사 집회 이후 2년5개월 만에 서울 도심에서 열린 대규모 집회다.


민중 총궐기 투쟁본부가 ‘모이자! 분노하자! #내려와라 박근혜 시민 촛불’을 내걸고 주도한 이날 집회에는 투쟁본부 소속뿐 아니라 중·고등학생부터 30~40대 직장인, 노년층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시민들이 모여들었다. 이들의 손에는 촛불이 들려 있었고, 청계광장 곳곳에는 ‘박근혜·최순실, 이제 진실을 말해야 합니다’ ‘순실봇 박근혜는 하야하라’ 같은 플래카드가 눈에 띄었다. 주최 측이 준비한 촛불 2000여 개는 일찌감치 동났고,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나눈 촛불도 마찬가지였다. 촛불이 떨어지자 일부는 직접 가져온 LED 촛불을 켜기도 했다.


[“인생 전체가 속았다는 느낌”]


이날 집회는 일반인들의 참여가 많았다. 애초 주최 측은 3000~4000명이 참여할 거라 내다봤지만 ‘최순실 게이트’에 분노한 시민들이 가세하며 그 규모가 커졌다. 실제 이날 촛불집회에 참가한 사람들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일찍부터 집회 일정을 공유했다. 또 집회 2~3일 전부터 주요 포털에 ‘박근혜 하야’ ‘촛불집회’ 등의 검색어가 오르내리며 촛불집회 관련 정보가 퍼졌다.


집회 현장에선 분노에 찬 다양한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정현찬 가톨릭농민회 회장은 개회사에서 “나라가 어려울 때마다 여기 모인 모든 국민의 힘으로 독재자를 물리쳤다”며 “박근혜 대통령은 더 이상 국민을 고통의 도가니로 몰아넣지 말고 즉시 퇴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반 시민들도 분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직장인 이재서(31)씨는 “이번 사태를 지켜보면서 인생 자체를 속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가만히 있으면 정치권이 안 바뀌겠단 생각에 오늘 집회에 참여했다”고 말했다.


시민들은 집회를 마친 오후 7시10분부터 거리행진을 벌였다. 손에는 ‘이게 나라냐’ ‘박근혜는 퇴진하라’는 피켓을 들고 있었다. 애초 집회 주최 측은 청계광장을 출발해 광교→보신각→종로2가→북인사마당까지 약 1.8㎞ 코스를 계획했다. 하지만 종로 일대에는 경찰의 차벽이 설치돼 광화문으로 경로를 바꿨다. 경찰은 세종문화회관과 교보빌딩 등 광화문 일대에 차벽을 치고 시위대의 행진을 막아 섰다. 이 과정에서 저지선을 뚫으려는 시위대와 경찰 간의 물리적 충돌이 발생했다. 시위대는 한목소리로 “박근혜 비켜라”고 외쳤다. 최대한 물리적 충돌을 피하겠다던 경찰은 차벽을 설치한 것에 대해 “시위대가 종로1가에서 우회한다는 원래 신고한 계획과 달리 직진을 시도해 차벽을 설치했다”고 말했다. 경찰은 이날 72개 중대 6300여 명을 청계광장 인근에 배치했다. 시위대와 경찰은 광화문광장 세종대왕상을 경계로 밤늦게까지 대치했다. 일부 시위대는 경찰의 방패를 빼앗으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경찰은 방송을 통해 “시위대가 폭력을 행사하면 캡사이신(최루액)을 뿌리겠다”고 경고했다. 현장에 백남기씨 사망사건으로 논란에 휩싸인 살수차가 이동하자 현장엔 팽팽한 긴장감이 돌았다.

한 집회 참가자가 29일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글을 적은 종이를 들고 있다. 강정현 기자

[“사회 비판 의식 자발적 행동으로 이어져”]


이날 시위에는 일반인들의 참여가 많았다. “몇 십 년 후 자식들에게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고 얘기하고 싶어 나왔다”는 고등학생들도 눈에 띄었다. 고3 수험생 최우택(18)군은 “이번 사태를 계기로 ‘우리나라가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이 성공할 수 있는 나라’라는 믿음이 깨졌다”며 “수능은 내년에 다시 치러도 되지만 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기회는 지금뿐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촛불집회 참여가 이번이 처음이라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고교생 딸을 둔 주부 반인정(45)씨는 “최씨의 딸이 명문대 부정입학 의혹에 연루된 걸 보면서 학부모로서 상실감이 컸다”고 말했다.


이처럼 다양한 배경의 시민이 참여한 데에는 미군 장갑차 여중생 치사사건(2002년), 세월호 침몰사고 원인 규명 집회(2014년) 등 과거의 주요 시위처럼 대중의 마음을 파고드는 정서적 요인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이택광 경희대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는 “(최씨의 국정 개입 규탄 촛불집회를 비롯한) 이들 시위의 공통점은 사람들이 자신의 일처럼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나선 점”이라고 설명했다.


실제 이번 집회에선 ‘뚜렷한 주도 세력’이 눈에 띄지 않는다. 촛불집회가 열린 이날도 집회 취지에 공감하고 참여를 독려하는 의견이 많았다. 트위터리안 ‘만큼’(@myh0818)은 “정부 규탄 행사에 제대로 참석한 적이 없어 늘 안타까웠고 다른 시민들에게 빚지는 기분이었다. 빚 갚으러 가야겠다”고 말했다. 주요 포털 사이트에서는 이날 촛불집회와 관련된 검색어가 눈에 띄었다. 이른 오후부터 ‘촛불집회’ ‘세월호 7시간’ 등의 검색어가 꾸준히 오르내렸다.


앞서 이날 집회 전 잇따라 시국선언을 발표했던 대학가의 분위기도 마찬가지다. 한총련(한국학생총학생회연합),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등 학생운동단체가 이끌었던 과거 대학가 시국선언이나 집회·시위와 달리 각 대학은 자발적으로 시국선언을 하고 집회에 나왔다. 최씨 딸 정유라(20)씨의 입학·학사 특혜 의혹을 받는 이화여대, 박 대통령의 모교인 서강대 학생들이 지난 26일 시국선언을 시작했고, 27일엔 한양대·KAIST 총학생회가 시국선언을 이어갔다. 촛불집회가 열린 이날에도 충북대에 ‘박근혜-최순실 정부는 책임지고 사퇴하라’ ‘우주의 기운을 담아, 꼭두각시 대통령은 물러나라’ 등의 대자보가 곳곳에 걸렸다. 한국교원대도 이번 사태를 계기로 긴급 대책위를 꾸리고 시국선언을 준비하고 있다. 학생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관련해 구정우 성균관대 교수는 “현재 대학생은 고교에 다니며 자신의 또래가 생명을 잃었던 세월호 참사(2014년 4월)를 지켜본 세대”라며 “이들의 한국 사회에 대한 비판적 의식이 자발적인 행동으로 옮겨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택광 경희대 교수는 “기존 학생 운동단체는 정치색이 짙어서 20대의 다양한 목소리를 모으는 데 한계가 있었다”며 “이번 사태는 (입시 비리 등) 학생들이 공통으로 느낄 만한 위기의식을 자극해 학생들의 주도적인 움직임을 이끌어냈다”고 말했다.


교수들의 참여도 두드러졌다. 27일 경북대 교수 88명이 ‘박근혜 하야 촉구 시국선언문’을 내놨고, 성균관대 교수 32명도 시국선언을 발표하며 “더 이상의 사회 혼란과 국격 추락을 방지하기 위해 대통령은 내각과 청와대 비서진을 전부 사퇴시키고 거국중립내각을 구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울대 등 주요 대학 교수들도 시국 선언을 준비하고 있다.


[서울서 제주까지, 전국 곳곳 동시 집회]


서울과 수도권뿐 아니라 전국 곳곳에서도 촛불집회가 열렸다. 조선업 불황 등 경기 침체의 직격탄을 맞고 있는 데다 최근 발생한 지진과 태풍 피해로 민심이 흉흉한 울산에서는 주최 측 추산 1000여 명이 모여 ‘울산시민 총궐기 대회’를 열었다. ‘박근혜 정권 퇴진하라’ ‘나와라 최순실, 하야하라 박근혜’ 같은 피켓을 든 이들은 “대통령이라는 호칭을 누구에게 붙여야 할지 혼란스럽다”며 개탄했다. 광주 지역 시민단체 회원 400여 명은 이날 오후 4시부터 5·18 민주광장에서 집회를 열었다. 이들은 박 대통령의 퇴진을 촉구하는 구호를 외치며 2㎞ 거리 행진을 했다. 제주에서도 오후 7시부터 민중 총궐기 제주위원회가 주최하는 ‘최순실의 나라, 박근혜 하야 촉구! 제주도민 촛불집회’가 열렸다. 이날 서울 촛불집회를 주최한 민중 총궐기 투쟁본부는 다음달 12일 예정된 ‘2016 민중 총궐기’ 이전까지 매일 저녁 집회를 열 계획이다.


조진형·김나한 기자, 이우연 인턴기자enish@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