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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를 oo으로 배웠네-시즌2] 셰익스피어는 왜 남장여자를 좋아했을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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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의 희극들에는 남장여자가 수시로 등장한다. 정말 유명한 ‘베니스의 상인’에서 결정적인 대사, “살 1파운드는 취할 수 있지만 피는 단 한 방울도 흘려선 안된다”고 말하는 사람이 바로 남자로 분장한 포샤(왠지 전통적인 셰익스피어 번역본의 느낌이 나게 하려면 ‘포오샤’라고 써야 할 것 같다)다. 그리고 영화 ‘셰익스피어의 사랑’ 때문에 유명해진 ‘십이야’의 바이올라, ‘뜻대로 하세요’의 로잘린드도 남장을 하고 등장한다. 공교롭게도 비극에는 남장여자 캐릭터가 등장하지 않는 반면, 희극에서만 등장한다는 점도 이채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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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저 또 왔어요. 뿌잉뿌잉 [중앙포토]

사실 반드시 셰익스피어가 아니라도 그 시대 작가들의 연극 대본에는 남장여자들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아예 ‘여배우’라는 직업이 없고, 사춘기 이전의 소년 배우들이 여자 역을 맡아야 했던 당시 분위기로 볼 때 남장여자 캐릭터는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남장여자들이 등장하는 데서, 셰익스피어가 진정 여자에게 기대했던 것이 무엇이었을까를 상상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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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여자들이 남자들은 섹시한 글래머라면 환장을 한다고 생각하곤 하지만, 수십년간 남자로 살아온 바에 따르면 이건 큰 오산이다. 물론 마릴린 먼로나 스칼렛 요한슨을 마다할 남자는 없겠지만 “너의 이상형이 저런 타입이냐?”고 물으면 당장 고개를 끄덕일 한국 남자는 그리 많지 않다. 오히려 대다수 한국 남자들은 왕년의 파멜라 앤더슨이나 근래의 케이트 업튼 같은 전형적인 밤쉘(Bombshell) 타입의 여자들을 좀 부담스럽게 생각한다. 절대 다수는 아니더라도, 꽤 많은 한국 남자들은 오히려 “가슴이 너무 크면 부담스럽다”고 말하기까지 한다. 가슴의 크기는 단적인 예지만, 그 밖에도 ‘과도한 여성성’을 부담스러워하는 한국 남자들의 수는 결코 적지 않다. 여기에는 ‘긴 머리, 짙은 화장, 진한 향수 냄새, 공주 의상 혹은 파티 의상’ 등이 모두 포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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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부담스럽다고?? 진심이냐? [영화 `어벤저스` 스틸사진]

물론 이런 태도는 상당히 많은 한국 남자들이 갖고 있는 이중적인 기준에서 온다고 할 수 있다. 즉 ‘그냥 같이 놀기 위한 여자’, 혹은 ‘연애하기 좋은 여자’와 ‘같이 살고 싶은 여자’ 또는 ‘내 아이를 낳고 가정을 꾸려줄 여자’가 달라야 한다는 학습의 결과다. 이게 왜 달라야 하는지 납득이 가게 설명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는데, 아무튼 한국의 남자들은 어려서부터 또래집단이나 선후배 관계를 통해 지속적으로 이와 유사한 논리를 주입당한다.

(많은 남자들은 인생을 좀 살아 본 뒤에야 서서히 이런 해괴한 도그마에서 빠져나오곤 한다. 예를 들어 많은 남자들이 ‘화끈한 여자’는 연애용, ‘조신한 여자’는 결혼용이라는 이상한 생각을 하곤 하는데, 여자와 살아 본 경험이 있는 남자들 중 상당수는 이런 구분이 만약 존재한다면 오히려 반대가 더 바람직하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는 것이다. 화끈하고 적극적인 여자들이야말로 집안 살림과 육아를 비롯한 여러 분야에서 훨씬 좋은 성과를 낸다. 반면 ‘조신하고 얌전한’ 여자들 중 상당수는 삶에 대해 별 의욕도 에너지도 없는 경우가 많아 연애할 때 꽃으로 섬김을 받기에는 적절하지만, 남자들이 기대하는 반려자로서는 별 기여가 없는 경우가 많더라는 것이다.)

어쨌든 이런 이상한 이분법에도 불구하고 남자들이 공통적으로 선호하는 타입, 즉 연애를 하건 결혼을 하건 가장 좋아하는 요소는 분명히 존재한다. 표현은 다양하지만 그 핵심을 요약하면 바로 ‘이해심’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이 이해심이란 별 것 아니다. ‘남자처럼 생각하고, 남자의 행동양식을 존중하는’ 것을 말한다.

아주 간단히 예를 들어 설명하면 이렇다. 여자친구가 있건 없건, 20대에서 30대에 이르는 수많은 남자들은 ‘여자 친구와 보내는 오붓한 시간’이 ‘남자 친구들과 어울려 바보 짓을 하고 노는 것’보다 그리 우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여친과의 뜨거운 밤도 좋지만, 사실 그게 없다고 해도 재미있는 친구들과의 하룻밤 모험은 그런 뜨거운 밤을 1주일 정도 연기해도 좋을 정도의 매력을 갖고 있다. 물론 대부분의 남자들은 어느 정도 균형을 생각한다. 예를 들어 한달에 4번의 불금이 있다면 2:2나 3:1(앞의 것이 데이트) 정도의 비율로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할 거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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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끼리 노는 게 재밌다고?? 진심이야? [영화 `스물` 스틸사진]

하지만 대다수의 여친들은 남친이 있는데도 불금을 자신이 남친과 보내지 않는 것은 대단히 굴욕적인 일이라고 생각하거나, 그 남친들로 하여금 그렇게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자신들에게 지극히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아마도 여친이 있는데도 남자들과 노는 것이 바람직하지도 도덕적으로 올바르지도 않고, 만약 그렇게 행동하는 남자가 있다면 대단히 큰 죄책감을 느끼게 해야 마땅하다고 믿는 듯 하다. 아무튼 남자들이 원하는 여친은, 한 남자가 자기 여친에게 “이번 주말엔 내 친구들과 어딜 좀 같이 가 줘야 할 것 같아”라고 말할 때 수많은 정상적인 여친들이 말하듯 “그럼 나는?”이라고 하는 대신 “알았어. 잘 놀아. 하지만 내 생각도 해야 돼. 내가 보고 싶어도 울지 말고” 라고 말해주는 여성이다.

압축해서 말하면 많은 남자들은 자신들의 이상형을 ‘사려깊은 여자’라고 표현한다. 반면 여자 쪽에서는 이런 경향을 어느 정도 알고, 거기에 맞춰 행동하는 여자들을 ‘방목형’이라고 표현하곤 한다. 애든 어른이든, 20대든 40대든, 남자들은 자신들의 목에 개 목걸이가 걸려 있고, 그 줄을 여자친구나 아내들이 쥐고 있다는 사실을 최대한 부정하려 한다. 하지만 여자들에게 있어 남자의 ‘철없는 친구들’과 그 주변 사람들은 좋게 보아 자신의 경쟁자이며, 나쁘게 보면 악의 상징이다.

‘베니스의 상인’에서 곧 죽을 위기에 놓인 안토니오가 친구 바사니오(포샤의 남편)에게 “훌륭한 자네 부인에게도 안부나 전해 주게”라고 하자 바사니오는 비통해 하며 매우 위험한 발언을 한다. 그리고 그 말은 남장을 하고 정체를 감춘 포샤에게 바로 응징당한다.

바사니오: 오. 안토니오. 내 아내는 나에겐 생명보다 소중하네. 하지만 내 생명도, 내 아내도, 전 세계도 나에겐 자네 생명보다 더 소중할 순 없어. 여기에 있는 이 사악한 악마로부터 자네만 구할 수 있다면 난 모든 걸 희생해도 좋아.
포샤: 만일 당신 부인이 옆에서 이 말을 들었다면 아마 달갑지는 않을 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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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포샤, 당신 마누라야. [영화 `베니스의 상인` 스틸사진]

만약 일반적인 여자들이 만족할 정도로 여자친구와의 관계에 충실하고, 남자들과의 관계를 하찮게 생각하는 남자가 존재한다면, 그런 남자는 그날 즉시 다른 남자들에 의해 ‘남자의 적’으로 지정될 것이다. 그 남자가 어떤 남자일 것 같냐고 일반적인 남자들에게 물어보면, 아마 대부분의 남자들은 입에 침을 튀기며 그런 놈(이런 표현이 적당할 것이다)은 여자에만 환장한 색마이거나, 남자들 사이에서 아무도 끼워주지 않는 왕따 혹은 사회 부적응자이거나, 자기 여자가 언제 뭘 하는지 직접 눈으로 확인하지 않으면 도저히 안심이 되지 않는 심각한 의처증 경향을 보이는 작자(곧바로 1991년작 줄리아 로버츠 주연 영화 ‘적과의 동침’의 남자 주인공을 연상한다)일 거라고 열을 올릴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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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머리가 왜이래. 어떤 놈이 헝클었어. [영화 `적과의 동침` 스틸사진]

이렇다 보니 남자들에게 ‘이해심 깊은 여자’로 여겨지는 방법 또한 아주 간단하다. 일단 그의 ‘남자 친구들’을 경쟁상대로 생각하지 않으면 된다. 사실 그들은 절대 여자친구의 경쟁자가 될 수 없다. 오히려 여자친구와의 연애 관계가 오래 지속될 수 있도록, 질리지 않게 해 주는 해방구(혹은 하수구)일 뿐이다. 하수구로 넘치는 오수를 억지로 막아 버리면, 그 물은 상수도로 역류한다. 이걸 적절히 조절하는 것이야 말로 ‘이해심’의 요체다.

한발 나아가, 남자들이 좋아하는 ‘사려깊은 여자’의 두번째 요소는 명쾌한 설명력이다. 많은 경우 남자들을 미치게 하는 여자들은 결코 설명해주지 않는다. ‘나쁜 여자’들은 남자들이 절대 이해하지 못하는 어마어마한 분노의 표출(예를 들면 “화 안 났어. 화 안 났다고!”)을 하고 돌아선 뒤, 여자들끼리 모여 저능아 같은 남자에 대한 규탄대회(예를 들어 “어떻게 그걸 몰라? 왜 몰라? 그걸 일일이 다 가르쳐 줘야 되는거야? 응?”)를 연다.
하지만 사려 깊은 여자들은 어떻게든 이 유인원들을 인간의 반열에 올려 놓기 위해 최대한 노력을 한다. ‘뜻대로 하세요’의 로잘린드는 남장을 하고 있는 자신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올란도(이것부터 이미 저능의 상징이다)에게 ‘나를 당신이 그토록 사랑한다는 로잘린드라고 생각하고, 심정을 털어 놔 보라’고 권한다. 그러면서 올란도를 교육한다. 예를 들면 이런 식.

로잘린드: 로잘린드와 결혼한 뒤 얼마나 살 생각인가요?
올란도: 언제까지나 영원히.
로잘린드: 영원이란 말 대신 하루만이라고 말하세요. 남자란 사랑을 속삭일 때는 꽃피는 시절이다가 결혼하는 순간 엄동설한이 된답니다. (중략) 저는 바바리산 숫비둘기보다 질투심이 강하고, 비 오기 전의 앵무새보다 더 심하게 바가지를 긁을 거에요. 원숭이보다 더 새 것을 밝히고, 아무 것도 아닌 일에도 아르테미스 상의 분수처럼 공연히 눈물을 쏟아낼 거예요. 당신이 기분 좋아 날뛸 때를 노려서요. (후략)
올란도: 과연 나의 로잘린드도 그럴까?
로잘린드: 내 목숨을 걸고 맹세하지만 물론이죠. 틀림없어요.
올란도: 아, 그러나 그녀는 총명하오.
로잘린드: 총명하기 때문에 더욱 그럴 수 있어요. (후략)

그러니까 사실 남자 다루는 법은 꽤 쉽다. “자, 내가 지금 1이라고 말하는데, 그건 1이 아니고 2란 뜻이야. 알았지? 1은 2야”라고 차근 차근 설명하면 대개는 통한다. “아니 내가 1이라고 말하면 2라고 알아들어야지, 그걸 왜 못 알아들어? 저능아야?” 그렇다. 이 부분이 정말 중요하다. 대부분의 남자는 침팬지보다 별로 나을 것이 없는 저능아라는 점만 잊지 않는다면, 당신의 연애 생활은 지금보다 훨씬 개선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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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내가 낫지. 담배는 하루 한갑. [평양 AP=뉴시스]

물론 셰익스피어의 작품으로 오늘날의 연애를 설명하는 데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 그는 근본적으로 요즘 기준을 적용한다면 여혐종자에 가깝다. 바이올라가 ‘어떤 여자 이야기’라면서 자신의 마음 속 사랑을 털어놓으면 오시노는 “네가 얘기한 여자의 사랑을 내 사랑과 비교하다니!”라며 흥분하고, 여기에 바이올라는 “여자들도 우리 남자들처럼 진실한 사랑을 할 수 있다”고 변명하기까지 한다. 심지어 ‘오셀로’의 여주인공 데스데모나의 아버지 브라반쇼는 데스데모나가 자신의 반대를 무릅쓰고 오셀로와의 사랑을 이루려 하자 오셀로에게 차갑게 내뱉는다. “기억해 두게. 아비를 속인 딸이 남편이라고 못 속일까.”

셰익스피어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지를 짐작해 보자면 그의 삶을 돌이켜보지 않을 수 없다. 18세 때 26세의 시골 처녀와 결혼해 21세에 이미 세 아이의 아버지가 된 셰익스피어는 도저히 이런 삶을 참을 수 없었는지 런던으로 진출해 배우 겸 극작가의 삶을 산다. 꽤 유복한 집안이었다고는 하나 어쨌든 단조로운 시골의 삶. 그것도 8세 연상의 처녀와 속도위반(최근 밝혀진 사료에 따르면 셰익스피어의 맏딸 수재너는 결혼 6개월만에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다)으로 황급히 결혼한 뒤, 런던으로 간 셰익스피어는 결혼생활에 대한 만족은 거의 느껴 보지 못한 것으로 추정된다. 심지어 유언장에도 아내 앤에게는 ‘집에서 두번째로 좋은 침대’를 유산으로 남겼을 뿐이다.

이런 정황을 통해 그의 마음 속을 넘겨 보기는 어렵지 않다. 런던으로 간 셰익스피어는 극작가와 배우로 쌓은 명성을 통해 수많은 ‘도시 여자’들과 자유로운 연애를 나눴을 것이고, 그 상대는 주로 아이를 키우고 있는 아내와 다른, ‘말이 통하는 여자’들이었을 것이다. 한국에서도 개화기 이후 처자식을 고향에 두고 경성이나 동경으로 유학을 떠난 ‘신식 남자’들이 도시에서 겪었을 마음 속의 갈등과 그리 다르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말이 통하는 여자’, 즉 ‘남자와 동등하게 자기 의견을 나눌 수 있는 여자’에 대한 셰익스피어의 마음 속 욕망이 결국은 그의 작품 속 남장 여자들, 즉 ‘남자 옷을 입은 사려깊고 현명한 여자들’로 표출되지 않았을까 싶다. 오늘날에도 많은 남자들이 ‘선머슴아 같은’ 여자 동료나 후배들을 ‘편한 사람들’로 여기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화장이나 옷차림에서도 지나치게 여성성을 강조하지 않으며, 말투도 ‘태양의 후예’의 김지원 처럼 ‘다, 나, 까’를 일상용어로 사용하는 그런 타입의 여자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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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말입니까. 남친있지 말입니다. [드라마 `태양의 후예` 스틸사진]

남자들과 함께 생활해야 하는 남녀공학이나 회사 등의 환경에서는 어느새 이런 ‘톰보이 스타일’을 자신의 보호막으로 사용하고 있는 여자들도 있는 듯 하다. 그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주위 남성들로부터 자신이 성적인 대상이 되는 것을 경계하는 마음에 자연스럽게 자신의 여성성을 감추게 된 것이 아닐까 싶은 사람들도 꽤 있다. 이런 여성들일수록 남성 중심 사회에서 그 핵심에 스며들기가 쉬운 것이 현실이다 보면, 셰익스피어가 동경했던 ‘이해심 깊은 남장여자’의 전통은 오늘날까지 면면히 숨을 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난 김유정이 좋던데 기자 yoojunglove@joongang.co.K*r

'연애를 OO으로 배웠네' 는?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들이 다양한 문화콘텐트에 연애 경험담을 엮어 연재하는 잡글입니다. 잡글이라 함은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기자 이름과 e메일 주소는 글 내용에 맞춰 허구로 만든 것이며 익명으로 연재합니다. 연애 좀비가 사랑꾼이 되는 그날까지 매주 금요일 업데이트합니다. 많은 의견과 성원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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