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유커에게 ‘추억’을 파는 면세점 만들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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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주영
산업부 기자

이런 이야길 들어본 적이 있으신지. 명품 매장을 방문한 중국인이 손가락으로 진열대 한줄을 통째로 가리키며 크게 ‘一’자를 그린다. 그러고는 “저만큼 다주세요”라고 말한다. 한수 위 고객도 있다. 손가락으로 물건 몇개만 골라낸다. 그러고는 “이거 빼고 다주세요”라고 한다는 것이다.

유통업계 관계자에게 물었더니 “예전에 그런 고객이 종종 있었다”고 말했다. 대답이 “있다”가 아니라 “있었다”였다. 그는 “명품은 여전히 인기를 끌지만 예전 만큼은 아니다”며 “그런 손님은 이제 전설이 됐다”고 말했다.

실제로 유커(游客)들의 명품 소비는 시들해지는 추세다. 공정거래위원회에 따르면 지난해 롯데면세점은 패션잡화 매출이 전년 보다 12%, 시계 및 보석이 16% 감소했다. 신라면세점은 각각 20%, 30%가 줄었다.

비단 한국 만의 문제가 아니다. 일본백화점협회가 발표한 8월 매출은 지난해 같은달 대비 6%가 하락했다. 명품의 본고장인 유럽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불룸버그에 따르면 올해 3월 중국 관광객의 유럽내 명품소비 현황도 20~30% 감소세가 뚜렸다.

사치품에 고세율 관세를 매기는 시진핑 주석의 반부패 정책의 영향도 크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따로 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중국에서 최근 명품 구매 대행서비스가 보편화 되면서 해외 명품 구매 유인이 확 줄었다고 분석했다. 여기에 또 하나의 악재가 최근 전해졌다. 중국 정부가 단체 관광 20% 축소 방침을 정한 것이다. <본지 10월 25일자 10면>

이런 여러 요인들로 유커들의 소비 패턴 변화는 눈에 띄게, 빠르게 진행될 전망이다. 실제로 최근엔 깃발을 앞세운 단체 관광객 보다는 삼삼오오 자유여행을 즐기는 싼커(散客)들이 늘어나는 추세다. 이들은 백화점과 면세점에서 명품을 쓸어담기 보다는 한국에서의 추억을 구매하고 싶어한다.

물론 지금 당장 유커들을 상대로 한 명품 판매를 포기할 수는 없다. 하지만 시대 변화를 읽지 않고 현실에 안주한다면 냄비 속 개구리가 될지 모른다. 유통 업체가 한국에서만 살 수 있는 실속있고 특색있는 상품 개발에 힘써야 하는 이유다. 전국 47개 면세점 매출 중 해외 브랜드가 63%에 달하는 현실은 분명 미래지향적이지 않다.

“한국인이 여행자유화 초기 외국에서 명품을 샀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은 것처럼, 중국인들이 한국에서 명품을 사는 시절도 곧 끝난다”는 관광업체 관계자의 이야기가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장주영 산업부 기자 jang.jooyo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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