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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년회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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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망년회 시즌이 망령처럼 또 찾아왔다. 음식점과 술집은 벌써 예약 마감한 곳도 있다고 한다.
서양엔 망년회 풍습이 따로 없다. 비슷한 것이 있다면 뉴 이어 이브 파티를 찾아낼까.
그러나 이것은 「오는 해」를 맞는 쪽이지, 「가는 해」를 위한 파티는 아니다. 파티라고는 하지만 먹고 마시고 떠드는 것이 아니고 가족끼리 과자와 코피를 마시며 시계의 초침이 새해 첫 자정을 알리면 「해피 뉴 이어」의 함성을 지르는 것이다.
망년은 글자 풀이를 보면 가는 해를 잊자는 것보다 나이를 잊자는 뜻이다. 망년회는 이를테면 나이를 잊는 파티인 셈이다. 주책이 없을 법도 하다.
일본 사람들은 「도시와스레」라고 한다. 연망이라는 뜻이다. 세밑이 되면 군신을 모아 연가회를 열고 새벽에 이르도록 술을 마신다. 이런 풍속은 3백년도 더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정작 우리 선조 들은 같은 무렵이면 수세의 풍속이 있었다. 일본의 망년과는 반대의 뜻. 나이를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고 지키기 위해 섣달 그믐날 밤엔 집안 구석구석에 등잔을 밝히고 새벽닭이 울기를 기다린다. 나이를 훔쳐가는 악귀를 좇는 의식이다.
망각은 좋은 일이다. 사람에게 기억력만 있고 망각이 없었다면 아마 세상은 정신병자로 꽉 찼을 것이다. 기억하고 슬퍼하기보다 잊어버리고 웃는 편이 얼마나 좋은가.
망각은 용서와도 통한다. 어블리비언 로(oblivion law)는 「망각의 법」이 아니라 사면법을 말한다.
그러나 너무 쉽게 망각하는 것은 기억력만 있는 인간보다 더 불행할 수도 있다. 역사를 망각하는 민족은 불행한 민족이다. 과거를 잊어버리는 사람은 나를 잊어버린 사람과 같다.
프랑스 사람들의 세밑 품속에 레베용(reveillon)이라는 것이 있다. 『새벽에 깨어난다』는 뜻에서 비롯된 말이다. 새해 첫 아침을 기다리며 먹는 밤참이 바로 레베용이다.
하필이면 일본사람들이나 떠들썩거리는 망년회에 우리가 덩달아 흥청거리는 것은 분수에 맞지 않는 일이다. 그것도 새해를 기다리는 기쁨보다 나이와 과거를 잊는다는 센티멘털리즘에 젖어 먹고 마시고 북적거리는 것은 기분 좋은 일만은 아니다.
우리는 너무 많이 기억하기보다 너무 쉽게 잊어버리는 가운데 너무 많은 것을 잃고 사는 것이다. 불행했던 나날일수록, 잘못된 일들일수록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면 그것의 반복은 없을 것이다.
역사는 전진해야지 언제까지 되풀이하고 있을 수만은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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