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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tch] 시계라고 쓰고, 욕망이라 읽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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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큐빅 하나 없는데 ‘억’ 소리나는 남성용 고급 시계의 속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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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의 오스카상으로 불리는 ‘제네바 시계 그랑프리’ 서울 전시에는 후보작 72점을 선보였으며, 전시품의 가치는 모두 100억 원에 달했다. 남성 시계의 개별 가격은 500만원(튜도 헤리티지 블랙 베이)부터 6억4000만원(오데마 피게의 로얄 오크 컨셉 수퍼소네리)까지였고, 쇼파드·오데마 피게·위블로 등 국내 론칭 브랜드는 물론 드베튠·MB&F·파베르제 등 국내에 상륙하지 않은 독립 시계 제작사의 제품들을 한 자리에 볼 수 있는 기회였다. 지난해 제네바 시계 그랑프리를 받은 그뤼벨 포시의 ‘투르비용 24 세컨즈 비전’ 시계. 22개 한정판으로 투르비용이 24초에 1회전하는 정교함으로 최고점을 받았다.

남자의 자존심-. 흔히 시계를 가리켜 하는 표현이다. 여자가 핸드백으로 힘을 준다면 남자는 살짝 드러나는 손목 시계에서 품격을 드러낸다. 남들과 한끗 다르다는 걸 은근슬쩍 보여주는 히든 카드다. 게다가 시계는 초당 수백 번씩 회전하는, 엄연한 기계 아닌가. 어린 아이가 로봇에 열광하듯, 남자는 정밀하게 조합된 손목 위 장남감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다. 시장이 이를 말해준다. 국내 시계시장 규모는 2011년 1조8290억원에서 3년 새 2조3350억원으로 28% 증가했다(한국시계산업협동조합). 하지만 정작 몇 천만원, 비싸게는 몇 억씩 하는 고가 시계에 대해 잘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알아봐야 브랜드 정도이고 대체 왜 비싼지, 어떤 기능을 갖고있는지에 대한 궁금증은 뒤로 밀린다. 공부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데, 때마침 이를 짚어볼 수 있는 계기가 있었다. 이달 10~13일간 열렸던 ‘제네바 시계 그랑프리’ 서울 전시다. 세계 유일의 시계 경연으로, 매년 그해 새로 출시한 시계 중 최고품을 뽑기에 ‘시계업계의 오스카상’으로 불린다. 이달 최종 선정에 앞서 12개 부문별로 각 6개씩의 시계가 후보작으로 뽑혔고, 이를 서울에서도 선보였다. 이 행사의 심사위원이기도 한 정희경 매뉴얼세븐 대표는 “기계식 시계는 다 비슷할 거라고들 생각하지만 시계 가치를 좌우하는 주요 요소별로 구분할 수 있다”며 “시상 부문은 바로 이런 잣대로 나눈 것인만큼 부문별 차이를 눈여겨보면 자연스럽게 시계 공부를 하는 셈”이라고 말했다.

다이얼시계의 기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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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메스의 ‘슬림 데르메스 애나멜’과 차펙 주네브의 ‘쾨데 베르그 33 비스’. 모두 각도에 따라 다른 빛을 내는 애나멜 다이얼이 특징인 제품이다.

어렵고 복잡한 시계, 하지만 기본은 역시 시간 표시다. 시·분·초침에 집중한 다이얼은 트렌드를 보여준다. 그 자체로 디자인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얼마나 쓰기 편리한지가 부각되기 때문이다. 일단 다이얼 크기를 보자. 2008년 세계 금융위기의 시발이 됐던 리먼 브라더스 사태 이후 아시아 시계 시장이 커지면서, 다이얼은 거꾸로 작아지는 추세다. 한때 남성 시계라 하면 지름 42~44mm는 됐지만 2~3년 사이엔 39mm까지 작아졌다. 여자도 찰 수 있는 사이즈다. 이에 맞춰 더 얇게 만든다. 가령 쇼파드(L.U.C XPS 1860)는 마이크로 로터를 달아 두께를 줄였다. 로터는 시계 동력장치인 무브먼트에 부착돼 그 속의 태엽이 지속적으로 감기도록 돕는 부품인데, 마이크로 로터의 경우 이를 무브먼트 안쪽에 넣을 수 있어서 두께가 달라진다.

디자인과 더불어 소재도 눈여겨 볼 것. 이번 전시에서 에르메스(슬림 데르메스 애나멜), 차펙 주네브(쾨데 베르그 33 비스)는 애나멜 다이얼을 동시에 내놨다. 비추는 방향에 따라 은은한 빛을 내는 것이 장점이지만 만드는 과정이 여간 까다롭지 않다. 구리·은 판에 안료를 발라 고온에 구워 만드는 중 색이 변하거나 쉽게 깨지기 때문에 몇몇 브랜드만 할 수 있는 기술이다.(행사에서는 이 기본 요소들을 ‘남자 시계 부문’으로 선정한다.)

투르비용‘억대’ 시계를 만드는 핵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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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화성·수성의 모습이 24초에 한 번씩 보이는 다이얼과 두 개의 트루비용을 탑재한 루이 모아네 의 ‘시드랄리스 이보’. (아래)실리콘 소재의 투르비용을 탑재한 율리스 나르덴의 ‘이그제큐티브 스켈레톤 투르비용’

시계가 왜 몇 억씩 하는 건지 궁금하다고? 답은 투르비용에 있다. 기계식 시계란 태엽을 말아놨다 서서히 풀어주면서 동력을 얻는 원리로 작동한다. 하지만 푸는 힘이 일정하지 않은 데다 중력 때문에 오차가 날 수밖에 없다. 이걸 잡아주는 게 투르비용이다. 1분마다 일정하게 회전하며 손목 움직임에 따른 오차를 줄여 준다. 하루 오차가 보통 10~15초 정도인데 투르비용이 장착되면 6초 정도로 줄어든다. 이를 더 줄이기 위해 어떤 브랜드는 투르비용을 1개가 아니라 2~3개를 넣기도 한다. 중요한 건 무게가 그만큼 늘어나선 안된다는 점. 최첨단 기술이 필요한 값비싼 부품이다보니 일단 투르비용이 들어간 시계는 1~2억을 호가하는 게 기본이다. 그나마 최근에 IWC·예거르쿨트르 등에서 5000만~6000만원대까지 내려간 제품을 내놓았다.

워낙 정교한 기술력을 필요로 하는 까닭에 대다수 브랜드는 이를 일부러 다이얼에 그대로 노출시킨다. 부품이 곧 디자인 역할을 하는 셈이다. 투르비용 형태는 물론이고 이를 고정시키는 브릿지 모양도 그래서 브랜드마다 제각각이다. 율리스 나르덴(이그제큐니브 스켈레톤)은 가벼운 실리콘 소재의 투르비용을, 루이 모아네(시드랄리스 이보)는 두 개의 투르비용을 나란히 탑재한 게 대표적인 예다.

크로노그래프부엉이 눈 모양의 스톱 워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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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적인 미네르바 크로노그래프를 기리며 만든 몽블랑의 ‘1858 크로노그래프 타키미터’ 한정판(왼쪽 사진)과 제니스의 ‘엘프리메로 36,000 VPH’.

크로노그래프는 쉽게 말해 시간의 간극을 재는 스톱 워치 기능이다. 사실 일상에서 쓸 일이 별로 없지만 여전히 남자들이 시계를 고를 때 이 기능을 가장 중시하고 또 선호한다는 게 업계 후문이다. 부엉이 눈처럼 다이얼 양쪽에 파고 들어간 다이얼 두개가 ‘뭔가 있어 보이는’ 디자인이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건 크로노그래프 시계를 사고도 정작 이 기능을 어떻게 써야하는지 모르는 이들이 꽤 많다는 점이다. 혹자 중엔 크로노그래프을 표시하는 핸즈(침)를 초침으로 착각해 계속 작동시키면서 부품을 빨리 마모시키기도 한다.

이용법은 간단하다. 보통 용두 주변으로 튀어나온 한 개 혹은 두 개의 버튼을 쓴다(용두와 결합한 제품도 있음). 시간을 재고 싶을 때 한 버튼을 눌러 시작-정지-리셋하거나(모노 푸셔), 시작-정지가 한 개 버튼, 리셋이 다른 한 개로 나눠 누르는 방식(더블 푸셔)이 일반적이다. 몽블랑(1858 크로노그래프 타키미터)은 평균 시속을 바로 확인할 수 있는 타키미터 한정판을 내놨고, 신제품 중 루이 모아네(메모리스 레드 이클립스)는 시계판 위로 크로노그래프를 배치했다.

캘린더2400년도 날짜까지 맞추는 정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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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일을 행성 모양으로 표시한 앤더슨주네브의 ‘퍼페추얼 세큘러 캘린더 20주년 블루 골드 다이얼’(왼쪽). 안드레아스 스트레흘러의 ‘륀 익스엑트’는 200만년 만에 1일 오차를 보이는 문페이즈로 기네스북에 올랐다.

일단 날짜가 표시되는 기계식 시계는 대단한 기술력을 갖췄다는 걸 보여준다. 퍼페추얼 캘린더는 한 달이 30일과 31일로 달라지고, 4년에 한 번씩 2월이 29일이 되는 윤년이라는 걸 모두 구현할 수 있다는 뜻이다. 거기에 한 달 단위로 달라지는 달의 모양을 나타내는 문페이즈까지 알려주는 제품이 대다수다. 그 정교함은 더 놀라운 수준이다. 웬만한 시계는 2100년까지 정확함을 보장하는데, 최근 2400년까지 오차가 없는 제품(앤더슨 주네브의 퍼페추얼 세큘러 캘린더)이 나왔다. 더 나아가 200만 년에 약 1일의 오차를 보이는 문페이즈로 기스네북에 기록된 시계(안드레아스 스테레흘러의 륀 익스엑트)까지 등장했다. 이 시계는 달의 모양만이 아니라 주기를 3시간 단위로 알려준다. 대체 요즘 같은 첨단시대에 왜 달에 그렇게 집착해야 하느냐고 따진다면 이유는 하나다. 시계라는 차가운 기계에서 가장 미적이고도 감성적인 부분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달라지는 달을 보며 ‘한 달이 또 지나가네’라는 세월의 흐름을 감지할 수 있다는 얘기다.

트래블 타임동시간대 여러 장소의 시간을 한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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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개 도시가 다이얼에 모두 표시된 루이비통의 ‘에스칼 타임존’(왼쪽 사진). 가운데 숫자가 다른 시간대를 표시하는 파베르제의 ‘파베르제 비지오네르 DTZ’.

휴대전화가 필수품이 되면서 따로 손목시계를 쓰지 않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듀얼 타임만큼은 시계가 더 편리하다. 현재 내가 있는 곳과 다른 지점의 시간을 바로 확인할 수 있다. 그것도 한 곳만이 아니라 두세 곳이 가능하다.

이 기능은 출장과 여행이 잦은 최근 라이프스타일에 맞춰 최근 여러 브랜드들이 가장 힘주는 부문이기도 하다. ‘서로 다른 시간대들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라는 디자인적인 요소가 가장 큰 관전 포인트다. 루이비통(에스칼 타임존)은 다이얼에 24개 도시를 설정, 모든 시간대를 한 눈에 확인할 수 있도록 장식했다. 이 외에도 숫자 인덱스 안쪽으로 작은 구슬이 돌아가며 15개 도시의 시간을 알려준다거나(드베튠의 DB25 월드 트래블러), 다이얼 정가운데 숫자로 떠나온 곳의 시간을 표시하는 (파베르제의 파베르제 비지오네르 DTZ) 제품이 나오기도 했다.

스포츠 시계방수 100m의 숨은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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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헬륨 밸브를 탑재하고 300m 방수 기능을 탑재한 에베하르드의 ‘스카포그라프 300’, 다이얼과 유리 사이에 특수 오일을 채워 어느 각도에서도 다이얼이 잘 보이도록 만든 르쌍스의 ‘타입5B’. 배 갑판같은 나무 상감 다이얼이 특징인 율리스 나르덴의 ‘그랜드 데크 마린 투르비용’.  

스포츠 시계에서 빠지지 않는 게 ‘방수 OOm’다. 그 깊은 물 속을 시계 차고 들어갈 일이 있을까 싶지만 여기엔 독해법이 따로 숨어 있다. 가령 방수 30m라 하면 그 깊이만큼 들어가는 게 괜찮다는 게 아니라 공기 중 습기, 비가 내리거나 물이 조금 튀는 등의 일상 생활에서 방수가 된다는 정도를 의미한다. 방수 50~100m는 낚시 수영 서핑 등에 문제가 없다는 수준이다. 진짜 잠수에 필요한 시계가 필요할 땐 에베하르드의 신제품(스카포그라프 300)처럼 최소 300m 방수 시계여야 한다. 헬륨 방출 밸브가 핵심 부품이다. 시계가 물 속에 있다 수면으로 올라올 압력이 갑자기 줄면 시계 내부 공기가 갑자기 팽창할 수 있기 때문에 이를 방지할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해서다.

예전 스포츠 시계는 실제 운동 경기 중 착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물에 젖지 않는 고무 밴드나 폴리에스테르 등을 사용해 만들었다. 하지만 요즘은 점점 더 고급화 추세다. 감히 물에 젖게 할 수 없는 악어가죽 줄에 금으로 만들기도 한다. 이유는? 당연하다. 아무리 스포츠 시계일지라도 그 기능에 충실한 본래의 목적보다 ‘남성다움’을 상징하는 역할을 더 많이 하기 때문이다.

글=이도은 기자 dangdol@joongang.co.kr
사진=매뉴얼세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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