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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자흐스탄서 한·미·중·러·영 '북한 비핵화' 세미나 개최…각국 신경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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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소련의 최대 핵실험장이 있었던 카자흐스탄에서 북한 비핵화를 다루는 국제학술대회가 열렸다.

카자흐스탄 알마티 키맵(KIMEP) 대학교는 20일(현지시간)부터 이틀간 ‘한반도의 핵군축: 정착지에 대한 전망’이라는 주제로 국제학술 세미나를 개최했다.

카자흐스탄은 구소련에서 독립할 당시 다양한 전략핵무기를 보유했지만, 국제사회의 경제지원과 안전보장 확약을 받고 1996년 이를 모두 폐기ㆍ해체했다. 올해는 카자흐스탄 동북부 세미팔라틴스크 실험장 폐쇄 25주년이 된 해다.

이 세미나는 키맵대 총장인 방찬영 총장의 제안으로 이뤄졌다. 방 총장은 외국인으로서 카자흐스탄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의 경제특보와 경제개혁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았다. 지난해 말 방북을 추진하며 ‘김정은 위원장의 대담한 도전’이라는 전략보고서를 준비했던 인물이다.

방 총장은 이날 기조연설을 통해 “북한은 미국의 위협정책을 비롯해 각국의 대북 제재 수위가 점점 올라가자 핵 보유에 대한 절박함도 강해지고 있는 상태”라며 “북한 입장에서 핵보유는 김정일ㆍ김정은 통치체제의 가장 위대한 업적이자, 미국의 선제 공격을 억지할 수 있는 최선의 수단”이라고 분석했다. 방 총장은 현재 북한은 만성적인 경제적 빈곤과 낙후가 지속되면서 오히려 핵개발이 김정은 통치 체제의 정통성을 정당화하기 위한 빼놓을 수 없는 위업(achievement)이 된 상태라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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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북한 입장에서 비핵화는 전쟁 억지력을 상실하는 동시에 김정은 통치 권력의 유일한 업적과 정당성을 스스로 포기해야 하는 것이라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라며 “때문에 대한민국ㆍ미국ㆍ중국ㆍ일본ㆍ러시아 등 6자회담 관계국으로부터 체제 보장과 동시에 개혁ㆍ개방을 전제로한 경제적 보상을 포괄적(comprehensive)이고 일괄적(package deal)으로 합의해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말하는 경제발전기금은 핵과 화학무기 포기 조건으로 10년간 300억달러(약 33조원)를 지급하는 것이다.

방 총장은 이 기금의 대부분을 대한민국이 지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북한의 비핵화 수용과 경제 개혁 개방의 최대 수혜국이 한국이기 때문”이라며 “300억달러 중 200억달러는 한국 기업들에 의해 건설될 기간 시설의 건설 비용으로 사용하면 된다. 이 비용은 한국이 매년 지출하고 있는 국방예산보다 적은 액수다”라고 설명했다. 방 총장은 이날 강연 도중 “김정은 위원장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나라고 믿었기 때문에 이 제안을 지난해말 북한에 가서 직접 전달하려 했으나 밑선에서 취소됐다”며 “학술대회 참석한 중ㆍ러 관계자들이 각국에 돌아가 시진핑 주석과 푸틴 대통령에게도 이 제안을 전달해줬으면 한다”고도 밝혔다.

방 총장의 이같은 제안에 대해 토론자로 참여한 동국대 박순성 교수는 “현실에서 이 제안이 성공적인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세부적 약속의 충실한 이행’과 진지한 협의가 중요하다”며 “북한의 경제적 성공이 이 타협안 실행의 중요한 변수인만큼 관련국 각국이 이를 위한 환경을 조성하는 데 협조해야 한다”고 말했다. 고려대 남성욱 교수도 “창조적이고 흥미로운 발상”이라며 “문제는 김정은 위원장이 이 제안을 수용할 수 있느냐의 여부”라고 언급했다.

반면 존 에버라드 전 주북한 영국대사는 “방 총장의 말처럼 현재 북한은 소련이 우주 비행사 유리 가가린을 자랑스러워했던것 만큼 핵을 국가의 자부심(National Pride)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만큼 체제 내에서 군사적ㆍ비군사적으로 강한 역할을 하고 있는 유일한 요소인 핵을 포기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솔직히 의문”이라며 “시장 개혁ㆍ개방이 북 지도자들에게 얼만큼 충분한 제안이 될지도 조심스럽게 생각해봐야 한다. 이미 미국 등이 수 차례 비슷한 제안을 했음에도 (북한이) 단칼에 거절하지 않았는가”라고 지적했다.

비핵화의 방안에 대한 각국 학자들의 의견차도 있었다. 류췬 중국 국방대학원 국방경제연구센터 교수는 ‘한반도 딜레마의 탈출구’라는 발제에서 “중국과 미국이 한반도 비핵화를 추진하기 위해 공동으로 해법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류 교수는 “한반도는 지리경제학적으로 장점이 있는 위치인데다 북한은 막대한 잠재력을 가졌다. 그러나 북핵문제로 한반도 위기가 고조돼 교착상태에 빠져 있다”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선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체제 전환(현재 휴전 상태를 평화협정으로 대체하는 것)이 동시에 추진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근본적인 해결책은 6자회담 모든 당사자들이 창조적인 해결책을 찾고, 타협점을 찾기 위해 전략적으로 의사소통 해야 한다”며 “중국과 미국이 아프가니스탄, 수단 등 국제적인 이슈를 함께 논의해온 것처럼 한반도 역시 머리를 맞대고 함께 해결책을 찾으려고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알렉산더 제빈 러시아 극동연구소 한국학센터소장은 “러시아는 지역적 상호 협력 개발 차원에서 한반도의 완전하고 비가역적인 비핵화를 굳건히(firmly) 찬성한다. 다만 한반도의 상황은 러시아를 포함한 관련 지역의 안보문제를 고려해야 한다”고 한 뒤 “지난 5월 김정은 위원장이 사업보고에서 ‘책임있는 핵 보유국’이라고 말한 것을 간과해선 안된다. 이는 긍정적인 신호일 수 있다”며 “이란 핵협상 타결을 한국 사례 적용할 수 있는 단서로 삼아야 한다”고 설명했다.

한국측 발제자로 참여한 연세대 양승함 교수는 “관련 국가들의 공동협력이 대북 제재의 효율성과 효과를 높일 수 있다”며 “제재가 강해진다면 북한 정부의 태도변화 유도할 수 있고, 궁극적으로는 북핵의 압박·동결·제거를 협상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세미나에서는 주한미군의 사드(THAADㆍ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결정을 두고 중국과 미국 한국 참가자단간의 미묘한 신경전도 벌어졌다. 주 지보(Zou Zhibo) 중국 사회과학원 세계정치ㆍ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은 “사드 배치는 북한의 핵무기 발전 속도를 빠르게 하고, 한반도 비핵화 협력을 깨트려 미·일·한과 중·러를 정면으로 부딪치게 한다”며 “사드 미사일 레이더로 중국 대륙을 볼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대한민국이 사드 배치를 결정한 것은 감정적이었거나 대한민국이 중·러와의 대립 가능성을 알면서도 미-일 군사동맹에 합류한 것으로밖에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에 고려대 남성욱 교수는 “사드 시스템에 대해 기술적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 같다. 사드 레이더 탐지 거리는 기본적으로 600km로 중국의 우려처럼 2000km까지 탐지할 수 있도록 쉽게 변형되는 것이 아니다”라며 “근본적인 원인은 북핵 문제다.북한이 핵을 포기한다면 남한 역시 사드가 필요하지 않다”고 반박했다.

이 행사에는 류췬 중국 국방대학 국방경제연구센터 교수와 알렉산더 제빈 러시아과학원 극동문제연구소 한국학센터 소장, 주 지보 중국 사회과학원 세계정치·경제연구소 연구위원, 존 에버라드 전 주북 영국대사 등 해외 전문가가 참석했다. 한국측에서는 남성욱 고려대 교수, 양승함 연세대 교수, 박순성 동국대 교수, 용인대 김응수ㆍ김인수 교수 등이 발제와 토론을 맡았다.

알마티=이지상 기자 ground@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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