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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인 고용시장에 노벨 경제학상이 제시한 해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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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김기찬
김기찬 기자 중앙일보 고용노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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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찬
논설위원
고용노동선임기자

이명박 정부에서 초대 노동부 장관을 지낸 이영희 인하대 명예교수가 지난주 별세했다. 2008년 2월 노동부 장관에 취임해 2009년 9월까지 재임했다. 그의 재임 시절 대기업을 중심으로 파업이 잦았다. 글로벌 금융위기에 정권 초 주도권 싸움 양상으로 변질되면서다. 2008년 파업으로 인한 근로손실일수가 80만9000일에 달했다. 이 기록은 최근 10년간 최고 수준이다. 이듬해부터 근로손실일수는 매년 20%가량씩 떨어졌다. 고인의 노력 덕이다.

힘이 지배하는 노사관계(IR)의 시대를 정리하고
능력이 중시되는 계약관계(CR) 시대 정립 필요

고인은 “이대로 가면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격차가 더 커질 것”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그는 퇴임식을 한 뒤 필자와 오찬을 하며 이렇게 말했다. “노동 3권(단결권·단체교섭권·단체행동권) 앞에 ‘근로의 권리’가 있다.” 장관으로 일하며 힘들었던 것도 “일할 권리를 무시하고 훼손하는 일이 잦아 상식이 통하지 않았던 점”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근로권이든 경영권이든 계약에 따른 의무만 잘 이행해도 사회는 건전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고용정책의 우선을 고용시장에서 계약문화를 바로잡는 데 둬야 한다고 생각했다. 제대로 일하고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면 문제가 없다는 거다. 한데 편법이 난무하고 힘의 논리가 득세하면서 계약이 틀어지고 무시된다. 기득권은 언제든 그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계약을 수정한다. 이게 사회 부조리를 낳고 만연케 한다.

사실 ‘계약’이라면 좀 딱딱한 기분이 든다. 인간미가 쏙 빠진 듯하다. 행복을 느끼게 하는 단어는 아니다.

올해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올리버 하트(하버드대)와 벵트 홀름스트룀(MIT)은 이런 생각과는 정반대로 계약을 말한다. 이들은 경제·사회 현상을 계약이란 관점에서 풀어냈다. 도덕적 해이가 나타나는 원인, 혁신이 없는 기업을 복잡한 수학공식으로 분석했다. 그러곤 그 원인을 어긋난 계약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제대로 된 계약을 하고, 그 계약에 충실했다면 이런 부작용이 생기지 않는다는 얘기다. 그래서 하트 교수는 “잘된 계약이야말로 행복한 사회를 만든다”고 말한다.

계약이론은 4차 산업혁명으로 요동치는 고용시장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4차 산업혁명은 회사의 경계와 근로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기업은 혁신을 위해 내부 사원에게만 업무를 맡기지 않는다. 외부 전문가에게 의뢰하고, 그 결과물에 대가를 지불하는 일이 많아진다. 직원이 외부인(outsider)으로 전락하는 경우가 빈번해진다는 말이다. 우버에서 보듯 개인의 물품이나 능력으로 사업자와 근로자의 신분을 넘나드는 일도 잦아질 것이다. 이런 산업문화를 지탱하고, 그 속에서 공정성을 확보하는 것 역시 계약이다. 계약에선 투입(input)보다는 결과물(output)이 중시된다. 근무한 시간이 얼마나 되느냐를 따져 그 대가로 임금을 받는 체계는 허물어진다. 노동과 자본의 투입을 따지는 시대가 서서히 저문다는 뜻이다. 대신 결과물을 본다. 혁신성이 높다면 대가는 커진다. 기업의 성패와 근로자의 부(富)는 ‘투입할 게 많은가’보다 ‘결과물이 어떠냐’에 의해 창출되는 시대가 우리 앞에 성큼 다가와 있다. 매년 임금이 오르는 호봉제 대신 성과와 창조, 혁신성을 중시하는 임금체계가 뜨는 것도 그래서다.

그런 면에서 집단적 노사관계(IR· Industrial Relations)의 시대는 사실상 끝나가고 있다. 계약관계(CR·Contractual Relations)의 시대가 도래했다. 노사관계는 힘의 논리가 지배한다. 노조의 막강한 힘과 기득권, 경영자의 제왕적 지위 같은 것 말이다. 이걸 무기로 삼으면서 계약은 깨진다. 힘이 센 쪽이 우위를 점하면 능력에 걸맞은 계약이나 계약 이행이 이뤄지지 않는다.

하트 교수는 “미래 최대 화두는 일자리다. 투명한 계약은 주인정신을 갖게 해 주고 경제주체 각자에게 이익을 준다”고 했다. 계약이란 따지고 보면 믿고 맡기는 거다. 굳이 힘을 과시하고 내세울 필요가 없다. 각자의 능력이 힘이다. 관행에 억울해할 일도 없다. 하트 교수가 행복을 계약에서 찾은 이유 아닐까. 올해 노벨 경제학상이 고용시장에 던진 해법은 어쩌면 멀미가 날 정도로 출렁이는 신산업시대에서 ‘행복 찾기’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김기찬 논설위원·고용노동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