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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의 고향<165>(글 사진 : 이용우기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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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진양화씨는 본디 지나에서 살다 우리나라에 건너와 귀화한 26개귀화성씨 가운데 하나다.한국인이 된지 5백여년이 지났으나 족세는 아직 희성.
16대를 이어오며 전국에 4백50여가구 2천여명이 오순도순 산다. 관향인 진양을 중심으로 경남지방과 부산시 일원에 주로 모여 살고있다.
득성시조는 화명신.
지나낭야사람인 그는 명조중엽 사부상서를 지낸 화평의 아들로 본성이「화」씨였다. 나라가 어지러워지는 것을 보고 『어진 사람은 기회를 알고 행한다』며「예의의 나라」조선에 망명했다.
경주에 은거, 학문으로 일관하던중 조정에 그 이름이 알려져 성종임금이 『중국의 화씨가 조선국에 귀화한 것은 향화의 의리』라며「화」자를 성으로 내려 화씨가 됐다.
경성군에 봉해진 그는 도승지에 기용됐다. 화씨네는 그러나 이득성조이후 세계를 잃어 명신의 6대손으로 알려진 화섭을 1세로 하여 세계를 이어간다.

<본래 성은 화씨>
화섭은 강원도영월에서 중국귀화민인 목·마·천씨와 더불어 도원결의로 터를 잡고살다가 임진왜란을 만난다. 선조30년(1597년) 다시 정유재란. 그는 원병 14만명을 이끌고 온 명나라 마귀제독을 만나 구국의 절의신이 된다.
마귀가 도원수 권율이 거느리는 조선군과 연합, 울산에서 도산성을 포위, 공격했다가 흑전장정의 위군에 패해 경주로 철수, 재공격을 준비하고 있을 무렵 그는『병력을 주면 왜군을 무찌르는 선봉에 서겠다』고 요청했다.
마귀는 화섭을 중군선봉장으로 삼고 건주기마 1만8천명을 거느리게 했다. 그는 이를 지휘,울산의 왜군을 몰아내고 이후 곳곳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선조31년 (1598년) 7년전쟁이 끝난뒤 그는 그 공으로 영양공의 시호를 받았다. 전주이씨를 아내로 맞았던 그는 전쟁이 끝난뒤 경남진양에 터를 잡았다.
화씨네가 진양을 관향으로 삼아 뿌리를 내린 연유다.
그의 외아들 봉선은 가선대부의 가자를 받았다. 화씨네는 득관조이후 안동권씨, 파평윤씨,성산이씨, 금녕금씨, 연일정씨, 창녕조씨, 진양강씨, 의성김씨등 영남의 명문 거족들과 통혼, 양반가문의 전통을 굳혔다.
5세 일취는 화문에서 유일하게 1등공신에 오른 거목.
영조4년 (1728년) 3월 이인좌 일파가 권세를 잡기 위해 조현세자의 적파손인 밀풍군을 왕으로 세워 왕통을 바르게 한다며 범졸을 모아 청주관아를 습격하는 반란을 일으켰다. 이른바이인좌의 난. 일취는 병조판서 오명항이 도순무사로 반란을 평정할때 그를 도와 이인좌일파를 소탕하는데 큰 공을 세운다.
양무원졸 일등공신으로 기록되고 가선대부·동지중구부사의 벼슬을 받았다.
초기 화씨네는 화영준(통정대부)·화일장(자헌대부)·화일희(가선대부)·하동휘(근형장군)
등이 상서관의 벼슬에 오르는등 가운을 크게 떨쳤다.
그러나 만주족의 청이 일어나 명나라가 망하고 청대종이 조선에 남아 있는 조선유민들을 모두 청으로 강제송환할 것을 요구하면서 수난의 세월로 접어들었다. 화씨네등은 산간벽지에 숨어 살아야했다.
당시 조선조정은 이들 명조유민들에게 은신처를 제공, 신변을 보호했으나 지방관리들은 차별대우를 하고 무거운 세금에 부역을 시키는등 횡포도 없지 않았다.
한바탕 폭풍이 지나간뒤 영조34년 (1758년) 사간원사간 유건이 이같이 비참한 명조유민들의 생활상을 조사, 임금에게 보고했다. 영조임금은 『임진왜란때의 수공으로 조선국의 신자가 된 명조귀화민의 후손들을 부역케 하거나 세금을 거두지 말고 열성조의 성지를 맑게 하라』는 어명을 내렸다.

<열부찬양문이 가보>
그후 화씨네를 비롯한 명조유민들에겐 일체의 조세와 부역을 면하게 하는등 거꾸로 특혜가 주어지기도 했다.
9세 덕봉은 헌종조때 숨은 선비로 문명을 떨쳤으나 아예 부귀와 벼슬을 멀리하고 후학들을 가르치는데만 전념했다.
그의 아들 상혁은 중국태고시대에서 명조에 이르기까지 당대문장가들의 시문을 집대성한 『기중문집』 을 필사본으로 남겼다.
9세 창도의 부인 진양강씨는 남편이 질병으로 쓰러지자 단지수혈로 목숨을 건졌고 보리흉년에 아사자가 속출하는 등 참상에도 첩첩산중을 헤매며 영약초를 구해다 닳여 먹이는등 30여년간 극진한 정성을 화문의 대표적인 유학자 화만관정화명길등이 유서깊은 진주향교의 곡교를 지내는 등 수는 적어도 충효의 열의 가풍은 굳건히 지켜왔다.
해방후에도 화씨네는 시조 섭이 터잡은 경남지방을 벗어나지 못한채 현재 15세종손 화명재씨(67) 가 종가의 정통을 계승하고 있다.
일제때 창씨개명을 강요당했다가 해방후 호적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사무착오로 화씨아닌 하씨로 등재돼 있는 사람도 상당수에 이르고 있어 12세 화오용씨(53) 가 일가찾기에 앞강서고 있다.
그동안 뿔뿔이 흩어진 일가간에도 내왕이 끊겼으나 최근 서울·강원도등지의 일가를 찾아내결속을 다지고 후손들이 가장 번창한 진양을 중심으로 종묘록을 간행하고 화의제를 건립하는등 조상의 빛나는 열을 되새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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