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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케스트라 연주하며, 한 악기 같은 호흡 인상적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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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1호 24면

대표적인 오케스트라를 꼽는 말로 ‘빅 파이브(Big Five)’가 있다. 미국의 5대 오케스트라인 뉴욕 필·보스턴 심포니·시카고 심포니·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를 일컫는 표현이다. 런던에도 ‘빅 파이브’가 있다. 독일 문화평론가 헤르베르트 하프너는 런던 심포니·BBC 심포니·런던 필·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로열 필하모닉(이하 로열 필)을 꼽았다.


이 가운데 영국 로열필이 지난 9월 예술의전당과 롯데콘서트홀에서 내한공연을 했다. 브람스 교향곡 4번은 뜨거운 연주로 기억에 남는다. “구조와 자유 사이의 긴장과 균형”이라는 지휘자 알렉산더 셸리의 견해가 반영된 해석이었다.


두 공연 모두 악장인 던컨 리델이 나오기 전 부악장이 서서 오케스트라의 조율을 이끌었다. 유일한 한국인 단원이기도 한 유슬기(31)였다. 공연 뒤 그녀를 만났다. 가장 먼저 궁금했던 건 영국 오케스트라의 오디션 통과 비결이었다.


“바이올린 협주곡은 물론 잘해야 하지만, 관현악곡 발췌연주가 중요해요. 모차르트·브람스·말러·슈트라우스의 교향곡·관현악곡의 특징을 꿰고 있어야 하죠. 평소 다양하게 음반을 듣고 곡 전체를 파악해 둬야 해요.”


2013년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제2바이올린 수석 수습단원이었던 유슬기는 재작년 로열 필 오디션에 통과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수습기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로열 필은 트라이얼(수습) 기간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아요. 몇 년이 되는 경우도 있어요. 은근히 피 말리는 시간들이죠. 5개월 만에 악장인 던컨 리델에게 반가운 전화가 왔습니다.”


유슬기는 대구 출신이다. 아버지는 공대 교수, 어머니는 바이올리니스트였다. 어릴 적엔 작은 바이올린을 장난감 삼아 놀았다. 스위스 로잔 공대에 교환교수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 로잔 콘서바토리에서 공부했다. 귀국 후 예원학교를 거쳐 예고 2학년 때 영국 퍼셀 스쿨로 유학 갔다. 이곳의 데이비드 타케노 교수를 따라 길드홀 스쿨에서 공부했다.


“타케노 선생님은 역사적인 필사본을 많이 소장하고 계셨죠. 활 긋기도 작곡가의 의도대로 해야 한다 하셨어요. 콩쿠르에는 유리하지 않은 주법이었죠.”


쉬운 길 놔두고 어려운 길을 걸었던 시간들이 지금의 토대가 된 것 같다고 유슬기는 말했다. 메뉴인 콩쿠르와 시게티후바이 콩쿠르 입상 후 2009년부터는 영국 실내악단 푸르니에 트리오의 바이올리니스트로도 활동 중이다.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에서 수습 단원으로 지내며 에사 페카 살로넨의 지휘를 경험했고, 영국 오케스트라 시스템을 이해할 수 있었다고 한다.


로열필은 연주여행이 많다. 창단 70주년인 올해는 공연이 더 늘어났다. 일주일 간 서로 다른 프로그램으로 연주하기도 한다. 악보를 빨리 익혀야 적응할 수 있다.


“초견이 좋아야 해요. 순발력이 중요하죠. 오케스트라에서 연주하며 한 악기 같은 호흡을 경험했어요. 나를 드러내지 않고 맨 뒷자리에 앉아있는 사람까지 맞춰 가려는 의지가 합쳐지며 훌륭하게 혼합된 음색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로열 필 수석지휘자 샤를 뒤투아, 피아니스트 마르타 아르헤리치와 함께.

샤를 뒤투아와 함께

유슬기는 “수석지휘자 샤를 뒤투아는 로열필의 잠재력을 이끌어낸다”고 했다. “직선적이고 단도직입적이세요. ‘한 팀(Same School)’임을 늘 강조하죠. 목관악기 리듬을 강조하는데 절대 타협이 없어요. 이번에 함께 온 부지휘자 알렉산더 셸리는 똑똑하고 능률적인 지휘자죠. 거의 모두 암보로 지휘하고요.”


악장 옆에 앉는 부악장이지만 투어 때 가끔씩 악장 역할을 담당하기도 한다. 명확한 연주를 지향하는 그녀의 악장 연주를 단원들은 “따르기 쉽다며 좋아한다”고 했다. 오케스트라는 사회적인 집단이기에 인간관계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오케스트라에 와서 사람들을 많이 관찰했어요. 영국의 독특한 문화, 유머감각에 동화되는 것이 중요하죠, 음악적인 견해를 이야기하며 너무 튀는 것도 좋지 않아요. 날씨 얘기나 부담없는 화제를 골랐죠. 그렇다고 입을 닫고 있어도 안 되고 친근감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속 마음을 드러내는 건 단체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유슬기의 목표는 깊이와 균형을 갖춘 연주자다. 솔로, 실내악, 오케스트라에서 두루 활약하며 궁극적으로는 솔로이스트로 활동하고 싶다는 꿈을 밝혔다.


“그동안 오케스트라와 실내악 경험으로 스코어 이해도가 높아졌어요. 제 세계가 깊고 넓어진 것 같습니다. 앞으로 10년 동안 더 끌어올려서 확신을 주는 연주자가 되고 싶어요.” ●


글 류태형 음악칼럼니스트ㆍ객원기자 mozart@joongang.co.kr 사진 김현동 기자ㆍ유슬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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