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서의 꿈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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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1호 29면

나의 취미를 뒤늦게 찾았다. 취미란에 독서·등산 정도로 가볍게 적어 두곤 했지만 사실은 나의 취미는 아니었다. 요즘은 취미를 ‘궁리’라고 대답한다. 궁리가 취미라고? 하지만 궁리는 늘상 따라다니는 친구 같다. 사랑스럽고 매력도 있다. 궁리하다 보면 흥미로움도, 힘도 생긴다. 무언가 생각이 떠오르면 나의 뇌 한쪽은 온통 궁리로 바쁘다. 그래 그거야! 좋았어! 그거 가능해! 긍정의 힘이 커진다. 때론 아깝다고 생각되기도 하여 메모해 둔 작은 수첩이나 메모장이 많은 편이다.


벌써 20년이 넘은 이야기다. 아이가 유치원에서 장난감을 가방에 담아왔다. 나쁘게 표현하면 훔쳐온 것이다. 당시엔 아이의 행동에 직설적으로 나무라지 않았다. 그러나 아이는 엄마의 눈치를 살피고 울기 시작했다. 왜 우느냐고 묻지도 않고 그냥 울게 두었다. 스스로 잘못한 것을 느끼게 했다. 한참을 울더니 조용히 앉아 엄마의 처분만 기다리는 눈치였다. 나는 머리가 복잡해졌다. 이 아이를 어떻게 이해시켜야 할지 고민해야 했기 때문이다.


나의 머릿속은 혼내는 감정을 표현하기 보다는 이해시킬 방법을 찾는 것이 옳을 것 같다는 판단을 했다. ‘생각’과 ‘행동’ 사이의 차이를 지금 벌어진 상황으로 설명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에게 “이 장난감이 가지고 싶었니?”하고 물었다. 다시 울먹거리며 고개만 끄덕였다. “그랬구나! 장난감을 가지고 싶어하는 것을 ‘생각’이라고 해”라고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그 장난감을 가방에 넣는 것을 ‘행동’이라고 또 설명했다. 유치원생이 이 오묘한 설명을 이해할리 만무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스스로 ‘생각’과 ‘행동’을 느끼게 하고 싶었다.


아이에게 질문을 했다. “이것을 집으로 가져와야겠다고 한 생각은 나쁜 생각일까? 좋은 생각일까?” 나쁜 생각이라고 대답했다. “그러면 가방에 넣는 행동은 나쁜 행동일까? 좋은 행동일까?” 물었다. 나쁜 행동이라고 대답했다. 염려했던 것보다 훨씬 명쾌하게 답을 잘 전달했다. 환하게 웃으며 안아주었다. 아이는 품안에서 큰 한숨을 내쉬었던 기억이 지금도 남아 있다. 이제는 어엿한 사회인이 된 아들은 성장하면서 ‘생각이 곧 행동’이라는 의미를 많이 느낀다며 잘 간직하고 싶다고 한다. 이 소중한 교훈은 나의 공직생활로 이어지게 된다.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해 30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까마득한 시간이었다. 직장생활을 마치고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는 중에 소중한 보물을 발견하게 됐다.


2009년 한 복지시설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복지시설의 기증 자료를 둘러보니 도서가 생각보다 많았다. 돌아오며 저 많은 책을 아이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체계적인 정리를 해주면 책과 더 가까워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막상 직장을 가지고 있는 형편에서 가능할까? 어떻게 시작을 해야 할지 고민을 하다가 사서들과 재능기부를 하자고 말머리를 시작했다. 한번 시범적으로 실천해 보자는 의지가 모아졌다.


시작이 반이라고 하듯이 1만8000여 책을 6개월 동안 마무리하고 예쁜 도서관 이름도 지었다. 정리를 기다리던 아이들의 눈망울이 지금도 선하다. 예전보다 책도 많이 읽는다는 소식을 듣기도 했다. 시범적인 재능기부 활동을 참여했던 사서들은 이 재능기부에 대해 더 고민하게 되었다. 도서관 환경이 열악한 아동복지 시설에 책이 있는 곳을 찾아 체계적으로 정리를 해 줄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 끝에 ‘사서의 재능기부 책수레 봉사단’을 만들게 되었고 지금도 지속적으로 활동의 폭을 넓혀 가고 있다.


또 하나의 사례가 있다. 장애인복지시설에서 기증 받은 책을 도서관처럼 꾸미고 싶다고 도움을 요청해왔다. 소재지가 명지대 근처였다. 명지대 문헌정보학과에 재학 중인 학생과 연락해 ‘사서의 재능기부’에 대해 설명하고 승낙을 얻었다. 그 학생은 수업시간 외의 시간을 활용해 1개월여 만에 자그마한 도서관으로 변신시켰다. 학교에서 배운 학습과 도서관 실무 실습을 토대로 도서관을 직접 꾸며 주면서 사서라는 직업관이 더 뚜렷해졌고 보람도 느꼈다는 소감을 듣고는 나도 뿌듯해졌다.


도서관 환경을 잘 갖추기 위해서는 체계적인 정리와 지속적인 관리를 할 전문적인 지도가 필요하다. 그러나 지역 아동복지시설 등은 대부분 규모가 작기 때문에 전문사서의 배치가 어려운 실정이다. 공공 도서관이나 대학 도서관 등 우리나라 도서관의 전문사서의 수는 턱없이 부족하다. 지식 정보에 대한 욕구가 급속도로 높아지고 다양화 되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 책에 대한 전문적 서비스와 지속적인 관리를 하는 사서들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졌다고 생각한다. 그런만큼 사서들이 전문성을 더 넓혀가도록 사회의 관심이 필요하다. 작은 바람이라면 어느 곳이든 책이 있는 곳에 도서관 문화가 잘 꾸며진 사회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사서들 또한 지역사회에 대한 공헌을 더 넓혀갈 수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복남선국립중앙도서관 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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