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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창태〈편집국장 대리〉죽음 부르는 체력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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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워낙 충격적인 일이 많은 세상이라 웬만한 일이면 으례 그러려니 하고 덤덤하게 넘어가는 세태가 됐다
그러나 해마다 입시 때만 가까와지면 전국곳곳에서 체력장검사를 받던 학생들이 졸도해 쓰러지고 숨지는 사고가 잇따르고 있는데도 덤덤하게 넘기고 있는 우리사회의 불감증은 지나쳐도 너무 지나치다는 생각을 갖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아무리 입시가「생지옥」으로 불리는 상황이라지만 상급학교 진학의 꿈을 안은 어린학생들이 그 때문에 목숨까지 잃고있다니 이 무슨 비극인가.
이번에 희생된 중3·고3의 두 학생도 필경 새벽 1시, 2시가 넘어서 잠자리에 들면서 『엄마, 새벽 5시에 꼭 깨워 줘』라는 말을 잠꼬대처럼 되뇌곤 했을 것이다.
새벽5시에 곤히 잠든 아들, 딸을 깨우기 위해 그「엄마」또한 새벽부터 잠을 설치며 무거운 눈을 비비고 일어나, 애처로운 생각으로 그들을 흔들어 깨웠을 것이다.
날이 새면 아침밥을 먹는 둥 마는 둥 대문을 나서는 아들에게 두 개씩이나 되는 도시락을 싸서 보내고, 밤이면 공부방에 켜진 불을 지켜보며 자는 둥 마는 둥 함께 잠을 설치며 뒷바라지에 정성을 다해오다 입시를 눈앞에 두고 참변을 당한 어머니, 그 모정의 비통한 가슴을 누가 어떻게 달래줄 수 있을 것인가.
학교교육의 기본목표가 지·덕·체를 함께 경비한 인격자를 양성하는데 있는 이상 체력장과 같은 제도를 만들어 체력향상을 도모하겠다는 취지는 누구도 나무랄 수 없다.
그러나 이 제도를 상급학교 입시와 무리하게 관련시키면서까지 수백만 어린 학생들에게 끊임없는 강박관념을 심어줘야 하느냐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체력장이 입시와 직결돼 실시되는 이상 평가기준을 아무리 낮춰 놓았다해도 치열한 경쟁속에서 1점이 아쉬운 수험생들로서는 턱걸이 한번이라도 더 하려고 안간힘을 다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학교교육이 입시준비외주의「학관교육」으로 전락된 현재의 교육상황아래서 입시를 향해 공부에 전념해야하는 학생들의 일과는 그렇지 않아도 고달프기 짝이 없다.
보충수업과 자율학습은 학교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특히 고교의 경우대부분의 학교에서는 밤10시∼11시까지 계속된다. 그래서 학생들은 자율학습을「심야타율학습」으로 부르기도 한다. 상급반은 아침7시에 등교해 15∼16시간을 학교와 독서실에서 보낸다.
그래서『선생님, 집에 다녀오겠습니다』는 말이 생겨날 정도가 됐다고 한다. 이러한 교육현장의 숨막히는 상황은 상급학교입시를 앞둔 자녀들을 가진 가정이라면 누구나 다 몸으로 겪는 생생한 체험이다.
이런 상황에서 입시준비 생들에게는 체력향상을 위해 평소에 꾸준히 운동연습을 할 마음의 여유와 겨를이 있을 수 없다. 이처럼 평소에는 체육시간을 제쳐놓았다가 체력장검사가 눈앞에 닥치면 부랴부랴 짧은 시간에 검사종목만 집중지도를 한다.
심지어 점수를 높이려고 체육교사를 초빙해서 「체력장과외」를 받는 학생이 있는가 하면, 교사들은 점수 따는 기술을 가르치기도 한다고 한다.
일상생활에서 운동이 부족하다가 단기간의 소나기연습으로 체력장을 치러내려니 무리가 오고 사고가 일어나는 것은 뻔한 이치다.
아무리 훌륭한 교육정책도, 그리고 어떤 이상적인 교육목표도 정확한 현실파악과 진단에 기초를 두지 않으면 부작용이 따르게 마련이다.
말썽 많던 졸업정원제도, 과외금지시책도, 그리고 고교평준화도 모두가 현실에 근거하지 않았거나 현실과 동떨어진 엉뚱한 목적으로 시책이 추진됐기 때문에 실패하거나 말썽이 끊이지 않고 있는 것 아닌가.
입시준비 생들이 주입식 암기공부에만 매달리는 현상을 놓고 「비정상」이니「파행」이니 하지만 그런 비판은 다 부질없는 넋두리다. 당장 상급학교에 붙고 봐야하는 학생들의 입장에서는 주입식 암기공부가 현실적으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인 데야 어찌하랴.
입시제도를 현행대로 방치한 채 체육의 필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본들 누가 귀를 기울일 것인가.
이 같은 현실적 문제를 감안할 때 체력강제도의 부작용을 해결하는 길은 분명해진다.
주입식 지식편중의 현행 입시제도를 근본적으로 뜯어고치든가, 그것이 당장 어렵다면 수험생들이 긴장하고 경직된 나머지 쓰러져 숨지는 일이 없도록 체력강의 시행방안만이라도 고쳐야한다.
현재 전국단위로 실시되는 체력장검사는 수검자의 90%이상이 만점(20점) 을 받아 선발고사로서의 변별력을 거의 상실했을 뿐만 아니라 학생들의 기초체력 향상에도 별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있다.
더욱이 내신제실시 이후 체육과목이 내신성적에 반영되고 있으므로 체력장에 의한 평가는 중복된 평가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많은 시간과 비용을 들여죽음까지 부르는 이 제도는 사실상 계속돼야할 명분을 잃고있는 것이 아닐까.
초·중·고교에서의 체력향상은 스포츠활동을 즐기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 있는 방안이 강구돼야하겠다.
이를 위해 전국단위로 실시되고 있는 체력장검사는 학교장 재량에 맡기고 학력고사총점에 합산하고있는 점수는 평소 체육과목의 시험평가에 따른 내신성적 반영으로 일원화하는 것이 이론적으로도 옳다.
또 지금까지 중3·고3때 단 한번 평가하던 방법을 바꾸어 전학년 3년간의 성적을 합산해서 평균하는 방법을 도입한다면 체육교육의 정상화도 어느 정도 기대할 수 있지 않겠는가.
72년 체력장검사가 실시된 이후 이 제도 때문에 숨진 학생은 13명에 이르고 있다.「죽음 부르는 체력장」이란 말이 나올만하다.
교육적 실험치고는 그 댓가가 너무 크다. 앞으로 또 얼마나 많은 우리의 귀여운 자녀들이 희생될지 모르는 상황이다. 이 문제만은 덤덤히 보아 넘겨서는 안되겠다. 더 이상 의미 없는 희생이 없도록 고칠 것은 빨리 고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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