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람] 홈쇼핑 채널 진행자 된 러시아 출신 율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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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전 외모가 좀 다를 뿐 속은 완전히 한국 사람이에요. 김치를 담그고 떡국도 끓일 줄 알죠. 제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은 구수한 냄새가 일품인 된장찌개예요. 한국에 처음 왔을 땐 여러 사람이 찌개 그릇에 숟가락을 갖다 대는 게 매우 이상했는데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아요."

홈쇼핑 채널에서 외국인으로선 처음으로 쇼핑 호스트가 된 러시아 출신의 율라(25.사진)는 자신을 편안한 이웃으로 대해달라며 이같이 말했다. 1997년 한국으로 귀화한 율라는 "어쨌으까""밥 묵었나" 등의 사투리를 거침없이 쏟아낼 만큼 한국말을 유창하게 구사한다.

율라는 지난달 말부터 매주 토요일 밤 LG홈쇼핑의 이탈리아 란제리 판매 방송에서 다른 두 명과 함께 쇼핑 호스트로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쇼핑 호스트는 TV홈쇼핑에서 상품을 소개하고 소비자들의 물품 구매를 유도하는 역할을 맡는 프로그램 사회자다.

홈쇼핑 프로그램이 대개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만큼 실수가 용납되지 않고 상당한 순발력이 요구된다. 그래서 그는 쇼핑 호스트로 처음 출연했을 때 몹시 긴장했다고 한다.

"첫 방송이 시작되자마자 저도 모르게 말문이 막히더라고요. 속옷에 대해 나름대로 공부하고 나갔지만 실수하지 않고 쉽게 설명해야 한다는 중압감이 컸던 것 같아요."

일단 외국인 미녀의 속옷 홍보가 시청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다른 프로그램들의 시간당 매출은 대략 3억~4억원인데 반해 율라가 출연한 프로그램은 1시간에 약 6억원의 매출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남성들이 아내나 여자친구들을 위해 물품 주문을 많이 하고 있다고 LG홈쇼핑 관계자는 귀띔했다.

율라가 한국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96년.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대에서 디자인을 공부할 때 만난 한국 친구를 따라 처음으로 서울을 찾았다. 한국에서 자리잡는 과정에선 모델 경력이 큰 도움이 됐다고 한다. 율라는 키 1m79cm의 늘씬한 몸매와 시원한 이목구비 덕분에 한국에 들어오기 전 2년 동안 핀란드 등 유럽에서 일류 모델로 활약했다.

그는 그동안 패션 디자이너 앙드레 김의 패션쇼에 메인 모델로 활동했고, 에스콰이아.나드리화장품.로만손시계 등의 광고모델로도 일했다. 올초부터 지난 6월까지는 케이블 코미디TV 시트콤에 출연했고, 최근에는 한 지상파 방송으로부터 드라마 출연까지 타진받고 있다.

율라는 화려한 사회적 활동과 달리 사생활에선 한푼이라도 아끼는데 열심인 '알뜰파'다. 현재 버는 돈의 70%를 저축한다. 매달 러시아에 계신 부모님께 용돈을 보내줄 만큼 효심도 지극하다.

"한국은 지하철 등 대중교통편이 좋아 차가 없어도 불편하지 않아요. 승용차를 가지면 기름값.세금 등 유지비용이 만만찮게 들어가는데 구태여 돈을 낭비할 필요가 없잖아요. 제가 갖고 있는 옷들도 대부분 10만원이 채 안돼요."

지난해 말엔 번잡하고 소음이 많다는 이유로 서울 강남에서 인천으로 이사했다.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오니 이웃 인심도 훨씬 좋고 집도 넓어져 한층 여유가 생겼단다.

물론 율라에게 항상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97년엔 모델로 일하면서 번 돈을 매니저가 중간에서 가로채기도 했다. 국내 유흥업소에 일하는 러시아 출신 여성들이 많아서 그런지 자신에 대해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시선도 적지 않다. 밤에 택시를 타면 운전기사들이 "어디서 일해요?""무슨 일 하느냐"고 꼬치꼬치 캐묻는다고 한다.

그는 몇년 전부터 인터넷 사이트를 개설해 한국에 들어오는 러시아인들을 위해 유익한 생활정보를 제공하고 사이버 상담을 해주고 있다. 조만간 러시아 여성들을 돕기 위해 러시아여성지원센터를 설립할 계획도 가지고 있다.

율라는 "어렵고 힘들게 사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고 있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남자를 배우자로 만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글=하재식 기자, 사진=김경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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