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아버님의 화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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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아버님, 그만 두세요. 그까짓것 뭐 하시게요? 시장에 가면 얼마든지 있는걸요.』 내가 그렇게 말하고 싶어도 아버님이 미안해하고 겸연쩍어 하실까봐 늘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 며칠전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지던 날이었다. 아버님이 또 바깥 창밑에 마련된 조그만 화단가에 웅크리고 앉아 비를 맞으시며 거기 심어진 파·고추포기를 손질하시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옷이 흠뻑 젖는 건 차치하고라도 저러시다가 또 감기라도 걸리면 어떡할까 싶었다.
그래서 『아이 아버님도, 또 감기걸리시려고 이러세요? 어서 일어나세요』하고 붙들어 일으켰더니 아버님은 버럭 성을 내시며 『이것놔! 가뭄에 말라비틀어졌다가 비를 맞고 춤을 추는 저 고추포기 좀 가꾸려는데 왜 간섭을 해. 왜 날 이런 짓도 못하게 하는거야?』하시는 것이 아닌가.
며느리의 무심코 한말과 행동에 역정까지 내시는 아버님이 야속하기도 했지만 한편 조심성이 없는 자신의 경솔이 더 가슴을 후비듯 후회스럽고 한없이 부끄럽기만 했다.
거기다 다음날 『에미야, 내가 어제 공연히 화를 냈구나. 비를 맞고 좋아하는 고추포기에 너무 신경을 써서 그랬어. 마음에 두지 마라』하시는 말씀을 듣고는 눈시울이 뜨끈해 그만 울음까지 터뜨릴 뻔 했다.
언젠가 아버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적도 었었다. 『이 손바닥만한 터전이 내겐 5천평의 큰 농장같이 보인다구.』
그렇다면 몇해전에 시골에서 5천평의 농토를 처분하시고 이곳 아들네집으로 이사오신 것을 은근히 후회하시는 건 아닐까? 그래서 조그만 화단에 채소를 가꾸며 아픈 마음과 시름을 달래시는지 몰랐다.
며느리는 살림만 잘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어른의 마음을 헤아리고 섬기기에 항시 밝은 눈을 뜨고 있어야하는 걸까?
벌써 화단의 고추포기에 보기만 해도 매운 냄새가 나는듯한 푸르고 야문 고추가 주렁주렁 달렸다. 그걸보니 여름내내 북돋우고 가꾸신 아버님의 정성이 결코 헛된 소일이 아니구나 새삼 느꼈다.

<부산시 남구 남천1동 16의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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