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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유민 몰려 서독 골머리|망명 핑계…올해 10만 넘을 듯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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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요즘 서독은 반갑지 않은 불청객들-외국으로부터의 망명자, 유민과 난민등-때문에 골치를 썩이고 있다. 70년초에 연간 1만명이하 수준이던 유민 숫자는 80년 10만8천명까지 치솟았다. 서독당국의 강경책에 힘입어 83년엔 연간 2만명 이하로 줄어들었으나 84년부터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하여 84년 3만5천명, 85년 7만4천명을 기록했다. 올해에는 다시 80년의 최고수준으로 되돌아가 10만명을 넘어설 것이라는 추산이다.
70년이후 지금까지의 유민은 70만명에 달한다.
이 때문에 현 서독정부의 실력자인 「슈트라우스UCS」(기독사회당) 당수같은 사람은『기본법(헌법)을 고쳐서라도 이 물결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고, 지난 21일 소련방문길에 「고르바초프」 서기장을 만난 「겐셔」 외상은 국제적인 협력 방안을 모색해줄것을 요청했으나 별 성과없이 되돌아오고 말았다.
서독 국내에서도 유민문제는 10월로 임박한 의회선거의 주요 쟁점으로 부각되고 있다. 또 국내 일각에서는 『순수한 독일민족은 그 수가 점차 감소하고 있는 반면 외국인들은 급증하고 있어 이대로 간다면 21세기 후반에는 게르만 민족이 한 명도 없는 독일이 되고 말 것』이라고 우려하기도 한다. 현재 서독인구는 6천1백만명으로 그 중 외국인이 7%(약4백20만명)를 차지하고 있다.
서독을 찾는 유민들의 국적과 신분·망명이유등은 가지각색이지만 하나의 공통점은 그들이 떠나온 고국이 생계유지조차 어렵고 분쟁이 끊이지 않거나 정치적 불안으로 국민들을 못살게하는 나라들이라는 점이다. 아시아에서는 스리랑카와 인도·베트남, 중동의 터키와 레바논·파키스탄·팔레스타인, 아프리카의 모로코와 이디오피아·가나, 그리고 동구의 폴란드와 루마니아등이 서독 유민의 주류를 이룬다.
이들이 사회가 안정되어 있고 하급 일자리를 아쉬운대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유럽대륙으로 몰려드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유민의 물결이 유독 서독으로 집중되고 있는데는 남다른 이유가 있다.
그 첫째 배경은 서독헌법이 제네바 헌장의 뜻을 받들어 제16조에 「정치적인 근거로 처벌받은 사람은 망명의 권리를 누릴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는데다 「동서 베를린 경계선을 국경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2차대전 승전4대국 협정이 유민들에게 손쉽게 입국할 수 있는 길을 터놓고 있다는 점이다.
나치스 시대의 유대인 학살로 죄의식을 느끼고 있는 서독이 정치적 난민에 관한 한 가장 관대해 서독에 가장 많이 몰리고 있다.
유민들이 일단 서독에 들어와 정치적 난민 신청을 하면 그 인정여부가 확정될 때까지 통상 1년, 심한 경우는 2∼3년 걸리는 경우도 있어 최소한 1년은 생계가 보장되는 셈이다.
실제로 지난 7월말까지 서독으로 들어간 유민 5만명 가운데 2만7천명이 동서 베를린 경계선을 거쳐간 것으로 집계 되었다.
두번째 배경은 서독 사회에 이미 유민들이 의지하고 기반을 닦을 수 있는 외국인 사회가형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서독은 60년대초부터 외국근로자들을 대량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하여 터키인의 경우는 1백만명을 넘어섰고, 이미 생활근거를 마련한 외국인들이 가족과 친지들을 끌어 들이고 또 이들을 연줄로 삼아 유민들이 줄을 잇고 있다는 이야기다.
서독 유민들의 입국경로는 앞서의 동서 베를린 외에도 오스트리아와의 국경인 프라이싱지역, 덴마크쪽의 플렌스베르크, 네덜란드쪽의 튀테른, 프랑스와의 국경인 자르브뤼켄지역등이 있고 각 지역마다 「터키인 전용통로」 「파키스탄인 통로」식으로 인종·유민별 창구가 마련되어 있다시피 되어있다.
뿐만 아니라 이들 국경지대에는 미국의 캘리포니아·멕시코 국경처럼 입국알선업자들이 들끓어 단순히 국경선까지 데려다 주는데는 4백마르크(약16만원), 통역을 겸해 망명신청까지 해주는 경우에는 1인당 5천마르크(약2백만원)를 받는 사업이 번창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이들 사업자중 가장 큰 몫을 차지하는 것은 소련과 동독의 항공사. 소련의 아에로플로트나 동독의 인터플루크 항공사는 제3국으로부터의 유민희망자들을 서베를린까지의 주요 통로인 모스크바나 동베를린의 셔네펠트공항까지 실어다줌으로써 막대한 수송비를 받아내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터키의 하바 욜라리 항공사도 해당된다고 한다. 이런 항공사들을 이용, 동베를린에 도착한 유민희망자들은 동서베를린간을 운행하는 지하철이나 SBAMN(전철)을 타고 이웃동네가듯 서베를린으로 넘어가고 다시 최종목적지인 서독의 다른 지방으로 가거나 서베를린에서 망명신청을 하게 된다.
유민홍수로 인한 서독정부의 고충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우선 망명신청을 접수하고 수용하고 정착시키는데 드는 비용이 연간 10억마르크(약4천억원)씩이나 들어간다.
베를린시같은 데서는 이로인한 재정부담이 더욱 크다. 대부분의 유민들이 서독으로 들어가는데 갖고있는 전재산을 항공료·입국알선료등 경비로 탕진하고 빈털터리로 들어오기 때문에 이들을 먹여살리는데에만도 엄청난 돈이 들어간다.
난민촌에서의 범죄가 도시로 파급되는 것도 문제다.
또 무일푼인 유민여자들이 인근 도심으로 나가 독일인을 상대로 매춘행위를 하다 적발되기도 했다.
이같은 상황때문에 서독은 관계법을 바꾸어서라도 유민 폭증을 막아보려는 시도를 하려고 나섰으나 거기에도 난관이 가로막혀 있다. 우선 법조문을 개정하는것이 제네바헌장정신에 위배될뿐 아니라 설사 개정이 된다 하더라도 동독이나 소련의 협조 없이는 4대국이 지켜보고 있는 베를린 경계를 봉쇄할 수도 없어 실효를 기대할 수 없는 실정이다.
결국은 서독이 혼자 힘만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게 된 것이다. 이에따라 유민들에 대한 대우가 점차 소홀해 지거나 시민들 사이에서도 이들에 대한 노골적인 냉대, 항의 데모등이 잇달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독을 찾는 유민들의 숫자는 좀처럼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고있다. 『서독에서 아무리 심하게 냉대를 한다한들 우리가 살던 나라보다는 몇배 낫다』고 생각하는 유민들이 거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파리=홍성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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