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내 기타는 잠들지 않는다 10. 기타 학원에서 탈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8면

전자 기타는 필자의 분신이다. 그러나 50년 전 필자는 전자 기타를 구할 돈이 없어 미 8군 무대 진출을 포기할 뻔했다.

학원에서 3일 간 아무 말 없이 기타를 배우던 그가 내게 말했다.

"저기, 3일간 연습했는데 선생님 기타 소리를 한 번도 못 들어봤어요. 기타 한번 쳐보시죠."

나는 "죄송합니다"라며 고개를 꾸벅 숙인 뒤 기타를 쳤다. 그랬더니 그가 깜짝 놀라는 게 아닌가.

"아니, 왜 여기 있어요? 내가 미 8군 무대에 출연하는데, 거기서 일 해보지 않을래요?"

그는 미 8군에서 일하는 남자 무용수였다. 안 그래도 주인 영감에게 월급도 못 받고 빚만 늘어 죽을 것 같던 처지에 잘 되었다 싶었다.

"그게 뭡니까?"

"미군 부대 안에 쇼단이 여럿 있어요. 선생님 실력이면 거기서 환영받을 겁니다."

난 목소리를 낮췄다. 학원 바로 옆의 대서소에 앉아 있던 주인 영감이 혹여 들을까봐서다.

"소리 좀 낮춰 말씀하십시오. 그리고 제발 저 좀 데려가 주십시오."

그도 깜짝 놀라며 조용히 속삭였다. 밖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다음날 아침. 아끼던 미제 하모니 기타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혹시나 주인 영감의 의심을 살까봐 다른 짐보따리는 챙기지 않았다. 또 한 번 탈출한 것이다.

그는 나를 원효로에 있던 미 8군 연예 대행회사로 데려갔다. 밴드 마스터 앞에서 오디션을 봐야했다.

"한번 쳐보게."

마스터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정신없이 기타를 쳤다. 마스터는 블루스 코드로 쳐 보라, 로큰롤 진행으로 해 보라며 각종 주문을 했다. 그 정도야 기본이었다.

"내일부터 나올 수 있나?"

"네. 나올 수 있습니다."

"악기는 있나?"

"네. 있습니다."

합격이었다. 그런데 한숨만 나왔다. 그가 말하는 '악기'란 전자 기타를 말하는 것이었다. 내가 갖고 있던 하모니 기타는 통기타였다. 1955년 당시 전자 기타는 상당한 고가품이었다. 내 능력으론 구할 도리가 없었다.

'내가 복이 없구나….'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종로 거리를 터벅터벅 걸었다. 다시 노예선과 다를 바 없는 학원으로 들어가야 하나…. 고민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아무 생각없이 걷다 보니 학원 건너편 쯤까지 도착해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가 뒤에서 어깨를 두드렸다.

"야!"

힘없이 고개를 돌렸다. 친척집 제약회사에서 일할 때 약품을 배달하며 알게 된 친구 전인호였다. 그 친구는 도매상에서 약품을 떼다가 약방에 납품하는 개인 사업가였다. 그렇게 친하진 않았지만 가끔 인사를 나누고 차를 함께 하던 사이였다.

"왜 힘이 하나도 없어?"

"그럴 일이 있어…."

"무슨 일인데?"

"아무것도 아냐…. 그냥 고민이 있어."

친구는 나를 데리고 지하 다방으로 내려가 차를 시켰다. 그러곤 캐물었다. 내 표정이 무척 심각해 보였던 모양이다.

"사실은…. 미 8군 오디션에 합격하고 오는 길인데, 전자 기타가 없어서 포기해야 할 것 같아."

나는 침울하게 털어놨다.

"뭐 그런 걸로 걱정하나. 따라와!"

그는 인근 악기점으로 들어가더니 말했다.

"골라."

"무슨 소리야. 너 돈 있어?"

"신경 쓰지 말고 골라."

신중현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