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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인사이드] “할아버지 묘를 파내라고?”…남의 땅에 묻힐 권리, 기로에 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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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을 앞두고 인부들이 묘지를 정돈하고 있다. [중앙포토]

대법, 22일 분묘기지권 소송 공개변론

“할아버지 묘를 옮기라고요?”

이번 추석때 고향을 찾은 김모(38)씨는 친척들에게서 뜻밖의 소식을 접했다. 김씨 일가 선산(先山)의 땅 주인이 펜션을 짓겠다며 김씨 할아버지 묘소를 포함한 조상묘 11기를 옮겨 달라고 종용한다는 이야기였다.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지금의 자리에 모신건 17년 전이다.

부랴부랴 변호사를 만난 김씨는 ”11기중 8기는 분묘기지권(墳墓基地權)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자문을 받았다. 친척들은 조상묘 8기를 지켰다는데 안도했지만 김씨는 ‘할아버지 묘를 포함한 3기는 이장(移葬)해야 한다’는 변호사의 말에 고개를 떨궜다.

타인 토지 이용할 권리 ‘분묘기지권’

분묘기지권은 남의 땅에 묘를 써도 분묘와 주변의 일정 토지를 사용할 수 있는 관습법상 권리다. 토지 소유자의 승낙을 얻었거나, 소유자 승낙 없이 분묘를 설치한 뒤 20년간 별 탈 없이 성묘 등을 하고 있는 경우에 한해 인정된다. 김씨 할아버지의 묘는 20년을 채우지 못한 경우다.

분묘기지권이 성립하는 묘지라면 땅주인이라도 함부로 이장할 수 없다. 동의 없이 이장하면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있다. 분묘기지권이 성립하지 않는 묘지는 땅주인이 시ㆍ도지사 허가 등을 거쳐 이장할 수 있다.

땅 주인도 아닌 사람에게 소유권과 비슷한 수준의 강력한 ‘권리’를 인정한 것은 일제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임야에 대한 소유권이 처음으로 인정되면서 땅 주인 허락 없이 분묘를 설치한 사람들과 토지 소유자간에 갈등이 빚어지자 1926년 조선고등법원은 ”20년간 평온ㆍ공연하게 분묘를 점유하면 지상권과 유사한 물권을 취득한다”며 분묘기지권을 처음 인정했다.

대한민국 법원도 1955년부터 이 법리를 받아들여 현재까지 분묘기지권은 관습법으로 인정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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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개발 둘러싼 갈등...‘묘지 알박기’도

분묘기지권이란 용어는 법전에 나오지 않는다. 법률 규정도 없는데다 ‘관습법’이다보니 분쟁도 적지 않다.

경남 김해와 창원 등에 집성촌을 이룬 거창 유씨 종중은 지난해 11월 “시조묘 등 조상묘 7기가 부산 산업단지에 편입돼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는 민원을 국민권익위원회에 냈다.

묘를 빼달라는 부산시와 “350년된 시조묘가 없어진다”며 맞선 종중간 입장차가 좁혀지지 않으면서 산업단지 공사를 마무리 하고도 1년 넘게 준공을 하지 못하는 등 사업 차질을 빚었다.

결국 권익위가 중재에 나섰다. 거창 유씨 종중이 분묘기지권을 포기하는 대신 부산시는 도시관리계획상 분묘 이장이 필요 없는 이상 묘지를 그대로 두기로 하는 조정안이 확정됐다.

양측은 법정 공방 직전에 한 발씩 양보하면서 타협점을 찾았지만 분묘를 옮기지 않는 한 토지소유권 등을 둘러싼 갈등이 재연될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묘지 알박기’도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분쟁 사례다. 특히 재개발 예정지 등 부동산 가격이 급등하는 지역은 시신을 옮긴 후에 무덤을 그대로 남겨두는 ‘헛무덤’도 많다.

최근 제주시의 한 아파트를 신축하는 과정에서 묘지를 관리하는 유족들이 30m² 남짓한 묘지에 대해 토지보상비로 8000만원을 요구한 일이 있었다. 결국 사업자는 시세보다 두 배 이상 비싼 값에 땅을 사들일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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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초동 대법원 전경 [중앙포토]

5년 끈 ‘분묘기지권 소송’ 대법원 판단만 남아..22일 공개변론

당사자끼리 해결한 분쟁도 많지만 한치의 양보없이 다투다 결국 대법원 까지 올라간 사건도 있다. 법전 어디에도 없는 분묘기지권이 ‘법의 저울’위에 오른 것이다.

분묘기지권은 관습법상 권리이기 때문에 법원이 인정해주지 않으면 더이상 권리라고 주장할 수 없게 된다. 최종심인 대법원 판결이 갖는 무게감이 그 만큼 크다는 의미다.

A(79ㆍ여) 씨는 2011년 자신에 땅에 설치된 분묘 6기를 옮기라며 원주원씨 후손들을 상대로 소송을 냈다. 원주원씨 후손은 ”1733년부터 문중 시조와 증조부 등을 안치하고 있었다“며 분묘기지권을 주장했다.

1, 2심은 이 가운데 1기의 묘는 20년이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장하고 나머지 5기는 그대로 두라고 선고했다. 분묘기지권을 인정한 판결이다.

상고심을 맡은 대법원은 이 사건을 대법관 전원이 참여하는 ‘전원합의체’에서 심리하기로 했다. 분묘기지권이 도입됐을 당시와 다르게 화장, 수목장 등이 늘어나면서 장묘 문화도 크게 변한데다 분묘기지권이 소유권을 지나치게 제한한다는 여론도 만만치 않다는 점이 고려됐다.

대법원 관계자는 ”소유권 보호 문제가 대두되면서 분묘기지권을 유지할 필요가 있는지,  판례를 바꿔야 하는지, 관습법이라는게 존재하는지를 판단하는게 쉽지 않은 일이어서 전원합의체에 올렸다“고 말했다.

대법원은 22일 이 사건에 대한 공개변론을 연다. 분묘기지권을 찬성하는 측과 이에 반대하는 입장을 들어보고 최종 판단을 하겠다는 취지다.

분묘기지권을 폐지해야 한다는 쪽은 ”매장에서 화장, 수목장 등으로 장묘 문화가 바뀌고 있는 만큼 토지소유권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논리를 편다. 반면 찬성측은 ”조상을 공경한다는 가치관이 더 중요하다”며 팽팽히 맞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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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양평의 한 수목장림(수목장:유골의 골분을 숲 속의 나무 주변에 뿌리거나 묻는 매장방식)

전국 1400여만개 분묘에 영향...올해안에 결론

대법원 판결의 최대 관심사는 100년 가까이 이어진 ‘분묘기지권’을 여전히 관습법으로 볼 수 있느냐 여부다. ‘20년이 지나면 분묘에 대한 사용권을 인정하는 관습’이 법적인 확신에 이를 정도롤 굳어진 상황이 돼야 ‘관습법’으로 인정받는데 과연 그 만큼 사회 구성원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는지가 핵심이다.

분묘기지권에 대한 대법원의 판단이 바뀔 경우, 즉 분묘기지권이 더 이상 인정되지 않는다면 전국 1400여만기의 분묘가 영향을 받을 전망이다.

국토연구원 등에 따르면 전국에 산재한 분묘는 2000만기로 추산되지만 이 가운데 토지 소유자가 분묘를 설치한 경우를 제외하면 1400만기 가량이 상황에 따라 송사에 휘말릴 가능성이 있다.

이번 대법원 판결에서 분묘기지권이 인정되지 않는 다고 해도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판결 결과는 당사자에게만 효력이 있다. 과거에 비슷한 사건으로 대법원 확정 판결을 받은 경우도 뒤집히지 않는다.

공개변론를 거친 사건은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2~3개월 내에 선고가 이뤄지는 만큼 분묘기지권에 대한 대법원 선고는 올해안에 나올 가능성이 높다.

오는 22일 오후 2시로 예정된 공개변론에 관심이 쏠리는 이유다. 공개변론은 대법원 홈페이지와 인터넷 포털, 한국정책방송을 통해 생중계된다.

김백기 기자 ke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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