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기업, 유령회사 세워 교묘히 무역 제재 피해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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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 등 국제사회의 제재대상에 올라있는 북한 단체들과 연루돼 있지만 제재망을 피한 기업·개인·선박이 562개에 달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아산정책연구원과 미국의 분쟁·안보 연구기관인 C4ADS는 19일 "1년 6개월에 걸쳐 각종 북한의 무역 관련 데이터를 공동 분석한 결과 현재 중국이나 동남아 국가 기업과 합법적으로 무역 활동을 하는 북한 기업 상당수가 이미 제재대상에 묶인 기업의 소유이거나 계열사 등의 형태로 엮여 있어 사실상 '제재 회피 창구'로 악용되고 있다"고 발표했다.

제재를 당하고 있는 북한 기업들이 실 소유권을 숨기기 위해 유령회사를 세우고 사업 단계별로 별도의 중개인을 고용하는가 하면, 북한 선박이면서 선박 등록국의 국기를 선박에 사용하는 방식으로 해외 기업들과 무역 거래를 버젓이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번 조사는 북한의 해외네트워크를 파악하기 위해 단순한 정보나 첩보 분석이 아닌 사업자 등록 정보, 납세 기록, 유럽선박정보시스템(Equasis), 국제무역정보업체 판지바(Panjiva)의 세관·무역정보, 실시간 위성 선박 추적자료 등 공개된 자료를 종합 분석했다. 조사 결과 북한 제재기업들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돼 있는 회사 247곳, 개인 167명, 선박 147척이 새롭게 밝혀졌다.

특히 이번 조사에선 중국 랴오닝(遼寧)성의 '랴오닝 홍샹(Liaoning Hongxiang)'이란 중견그룹이 북한과 의심스런 대규모 무역 거래를 하는 핵심 주체로 확인됐다. 현재 이 그룹은 북한 관련 제재대상에 포함돼 있지 않다.

랴오닝 홍샹은 관계사를 통해 지난 2월부터 4월에 걸쳐 북한 남포항에 대량의 석탄을 실어 나른 것을 비롯, 군사용으로 전용될 가능성이 있는 알루미늄 파이프, 세라믹(비금속무기재료) 등을 집중 거래해 온 것으로 드러났다. 유엔 제재를 통해 금지된 이중 용도 품목(dual use goods) 거래에 해당한다. 2011년 1월부터 지난해 9월까지 4년 9개월 동안 이 기업과 북한의 무역거래 규모는 5억3200만 달러(약 6000억원) 에 달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는 북한이 2004년 12월부터 10년 여 동안 개성공단을 통해 벌어들인 5억6000만 달러와 비슷한 규모다.

또한 북한의 전문 해커부대 '121부대'의 비밀 사무실이 있는 곳으로 알려진 중국 선양시 칠보산 호텔도 북한과 합자회사(조인트벤처) 방식으로 공동 운영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게다가 이 회사는 미국 정부로부터 제재대상에 올라 있는 미얀마의 한 군부 관련 인사와도 3억 달러 규모의 디젤 연료를 거래한 것으로 드러났다, '미얀마→중국→북한'으로 이어지는 북한의 '무역 세탁' 흐름이 확인된 셈이다.

아산정책연구원 우정엽 연구위원은 "이번 네트워크 분석을 통해 누가 북한의 제재대상들과 거래를 하고 있으며, 핵 비확산 노력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재화·용역의 수출입에 연루된 실체가 어떤 기관들인지 밝혀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 고명현 연구위원은 "그 동안 대북 제재가 생각보다 효과가 없었던 이유는 제재를 하면서도 큰 구멍이 뚫려 있었기 때문"이라며 "이번에 조사된 광범위한 정보를 향후 제재 지침에 반영해 나갈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아산정책연구원은 이번 조사결과를 토대로 "북한은 합법적인 국제무역, 금융, 운송시스템을 앞세워 자국의 불법 네트워크를 숨기는데 점점 더 능숙해지고 있다"며 "지난 3월 유엔 안보리결의에 따라 북한 기관과 거래를 지속하는 모든 제3국 기관과의 금융거래를 차단할 수 있는 '세컨더리 보이콧' 조항이 포함된 만큼 이를 시행하는 게 시급하다"고 제언했다.

워싱턴=김현기 특파원 luckym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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