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민 정말 떠나십니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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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유민 홍진기 회장. 정말 떠나십니까.
엊그제까지도 21세기 한극첨단기술의 산실을 만들겠다고 나와 함께 삼성종합기술원 기공식의 첫 삽을 힘차게 들며 담소하셨는데, 이제 유명을 달리하시다니 도무지 믿어지지 않습니다.
객지 동경에서 창졸간에 급환소식을 듣고도 평소 강건한 의지와 정신력을 보여 주었던 유민은 곧 회복되리라 믿고 있었읍니다.
나와는 7년 연하인 유민은 건강도 좋아서 나보다 적어도 10년은 더 사시면서 내 뒤를 이어 삼성을 뒷받침할 줄 알았는데 먼저 가셨으니 어찌된 일입니까.
유민.
지난 20여 성상을 돌아보면 당신은 하루 한 시도 빠짐없이 나와 고락을 함께 하며 내 일 생을 통해 제일 많은 시간을 접촉한 평생의 동지요, 삼성을 이끌어온 같은 입장이요, 사업의 반려자였고, 가정적으로도 나의 사돈이였읍니다.
유민은 그동안 갖은 역경과 고초를 다 겪으면서 잘된 일은 모두 나에게 미루고, 혹 잘못된 일은 당신의 불찰로 돌리셨읍니다.
1964년 동양방송을 창립하고, 그 이듬해 중앙일보를 창간하여, 유민은 오늘의 중앙일보를 한국언론의 정상은 물론 세계 유수 신문의 대열에서는 대 신문으로 만드셨읍니다.
중앙일보가 창간 14년 만인 1978년 발행 부수 백만 부를 돌파한 것은 한국언론사상 초유의 기록이었을 뿐 아니라 세계 언론사에도 전례 없던 일이었읍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우리 나라 민간 텔리비전 방송의 효시였던 동양방송을 일약 최고시청률의 방송매체로 발전시켜, 한국 전파문화의 신기원을 이룩했던 것도 유민이 하신 일이었습니다. 그 동양방송이 해체되는 시련을 딛고도 오히려 당신은 더 한층 강인한 용기로 중앙일보를 다시금 도약의 반석 위에 올려놓으셨읍니다.
유민이 중앙매스컴을 일으키신 지난 20여년은 우리 민족사에도 유례없는 격동과 변화의 시대였읍니다.
그런 파란만장한 속에서도 유민은 사회의 평화와 번영에 기여하고, 국리민복에 이바지하는 언론의 정도를 꿋꿋이 가며, 다른 한편으로는 언론사업의 새로운 경영기법을 창출하여 오늘 중앙매스컴을 세계적 언론의 기업적 토대 위에 서게 만들었읍니다.
1985년9월22일 중앙일보 창간20주년을 맞으며 준공을 본 중앙일보 신 사옥은 신문사 단일 건물로는 물론 화강석 건물로도 세계 최대의 규모이며 시설에 있어서도 최첨단의 설비를 갖추어 언론전당으로 세계에 손색이 없는 기념비적 건물입니다. 이것은 오로지 백년 앞을 내다보는 유민의 웅지와 원대한 포부를 나타내 보인 것입니다.
유민은 언론인으로서 우리 사회의 깊은 존경을 받으셨지만 이 시대의 다시 보기 어려운 경륜가요, 탁월한 사업가로서도 많은 위업을 남겼읍니다.
유민이 없는 삼성은 상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당신은 모든 면에서 나의 일을 지혜롭게 뒷받침해 주었고, 추진력이 되어 주었읍니다.
삼성이 오늘에 이른 것은 유민의 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유민은 만년에 첨단기술산업에도 각별한 관심과 열의를 갖고 한국산업의 일대 웅비를 겨냥하며, 반도체·유전공학·신소재산업분야에 집념과 열의를 쏟고 진력했던 일은 한국 기업사에 길이 남을 것입니다.
근자엔 초정밀반도체의 개발을 격려하며 그 성공의 날만을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유민이 뜻하는 그 모든 일들이 좋은 결실을 보려는 즈음에 세상을 떠나셨읍니다.
그러나 유민.
당신의 유업들은 하나 하나 값있게 계승되어 우리의 정성과 노력으로 더욱 더 발전할 것이며, 당신의 유덕은 길이 경모될 것입니다.
언제나 독실한 불교도로서 깨끗하게 수양 정진하는 생활을 하고, 일생을 정당하게 사시려고 노력한 유민은 분명 극락에 왕생하실 것입니다.
부디 대우주에 영생하시길 합장해 기원합니다. <삼성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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