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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마음을 얻는 공간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495호 29면

발끝이 아픈데 이유를 몰랐다. 겁이 많아서 병원 갈 생각은 못하고 혼자 전전긍긍했다. 허랑 방탕하게 살았던 값을 치룰 때가 된 것일까. 발끝이 아파 맥주 잔을 앞에 놓고 제사만 지내던 친구들이 떠올랐다. 호기롭게 잔을 들면서 마음 속으로는 이 친구들을 불쌍히 여겼는데 내게도 통풍이 온 것일까. 아무도 없는 곳에서 몰래 포털 사이트 검색창에 ‘통풍’이라고 쳐 본다. 어떤 증상인지 수많은 이들의 경험담을 들여다 보면서 내 통증과 비교를 해 본다. 당장 치명적인 병은 아니라 여겨 여전히 병원을 찾지는 않았다. 간헐적으로 아팠지만 여러 달을 참았다.


어느 날 문득, 발끝이 곪았다는 것을 알아챘다. 통풍이 아니었다. 고름이 나왔다. 발톱이 안으로 휘어 파고들면서 염증이 생겼고 그 자리가 덧난 것이다. 여러달 고통을 참으면서 맥주를 삼가한 자가 진단과 자가 치료에 파탄이 났다. 다시 인터넷을 검색한다. 발톱·통증·염증 등의 키워드를 조합해 검색한 결과는 내상발톱. 제법 흔한 병이다. 고구마 줄기처럼 여기에도 온갖 자가 치료법과 이야기들이 검색에 딸려 나온다. 병원에 가면 가차없이 발톱을 빼 버린다는 이야기도 있어서 더럭 겁이 난다. 자가 치료를 하려면 발톱을 갈고 굽은 부분을 잡아주는 도구들을 갖추어야 하는데, 이것들을 갖추는 쇼핑을 해 보려니, 이것도 쉽지가 않다.


또 여러달 시간이 갔다. 결국 해법은 엉뚱한 곳에서 찾았다. 집근처 네일숍에 내상발톱을 치료해 준다는 포스터가 붙었다. 여자들만 가는 곳이라 생각해서 문을 밀고 들어가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여러번 문앞을 맴돌다 포기했다. 어린 딸을 앞세워 겨우 문을 열었다. 손톱 손질과 꾸미기가 얼굴을 맞대고 하는 장사라서 친절하기가 이를 데 없다. 그곳에서 줄로 갈고, 가끔은 에나멜도 칠하면서 발톱을 펴고 있다. 여전히 남자들은 애인의 손톱 손질에 동행하는 것 말고는 찾아보기 어려운 곳이지만 이젠 제법 익숙하게 드나들고 있다. 처음엔 쑥스러워서 고개도 못들었는데 일하는 분들과 농담도 주고 받는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많이도 나눈다. 네일숍에서 치장만 하는 것이 아닌가 보다. 병원에 갔으면 간단하게 해결했을 일을 머뭇거리면서 돌아돌아 가고 있다. 미련한 일이다. 이런 간단한 질병이 아니었다면 덧나고 도져서 큰 일로 번질 수도 있는 심각한 상황을 만났을 수도 있다. 하지만 여전히 병원 가는 것이 쉽지 않다. 점점 더 상업화되어 가는 의료 현실에서 과잉 진료에 대한 두려움도 있고 여전히 권위적인 이미지의 의사 선생님을 만나는 것이 어렵다. 무엇보다 근본적으로 외로운,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겐 병을 고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위로를 얻고 마음의 평안을 얻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대체 의학이나 민간 요법에 열중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전자책의 성장세가 완연히 꺽이고 작은 서점들이 살아나고 있다는 이야기를 세계에서 가장 큰 출판사의 대표에게서 들으면서 엉뚱하게 발톱을 생각했다. 가이드 라인 없는 경쟁을 하고 있는 시장에서 이미 많은 영국의 서점들이 문을 닫았다. 하지만 할인 경쟁에 뛰어들지 않고 책의 가치를 명실 상부하게 지키고 있는 서점들이 건재하고 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있다고 한다. 성공적인 서점들은 모두 서점이 위치한 지역에 특화된 서비스들을 제공하고 있고 동네 사람들의 지지를 받는 커뮤니티 센터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한다. 서점 직원들은 직접 책을 읽고 독자들에게 추천할 책을 선정한다. 그리고 그 책을 독자들과 함께 읽고 감상과 생각을 서로 나눌 수 있는 기회를 끊임없이 만든다. 퇴근 길에 편히 들러서 책을 손에 쥐고 저자를 만나는 일도 드물지 않다. 독자들은 이런 서비스를 제공한 서점에서 기꺼이 정가를 주고 책을 산다. 이들은 이제 단순한 독자를 넘어 서점의 후원자이자 친구이다. 같은 일이 런던에서, 파리에서, 그리고 서울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서점 창업을 돕기 위한 학교에 대한 관심이 뜨겁고 자신의 취미와 관심을 살린 특화된 서점들이 비온 뒤 죽순처럼 여기저기서 나타나고 있다.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퇴직 후에 치킨집 보다 서점을 하겠다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는 것은 아닐까. 곳곳에 자신의 특색을 뽐내는, 아름다운 서점들이 자리잡는 공상을 해 본다.


하지만 현실은 냉정하다. 서울에서 눈에 띄게 독립 서점의 숫자가 늘고 있지만 문을 열었다 금방 닫는 경우도 함께 늘고 있다. 사람의 마음을 얻어 공간을 운영하려면 병원 앞에서, 혹은 네일숍 앞에서처럼 망설이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공간으로 들어 온 사람들에게 마음에 평화와 유대감을 심어주어야 할 것이다. 파리에서 서점을 하는 친구에게 “신을 떠난 사람이 많은 도시에서 서점이 새로운 안식처 노릇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냐”는 농을 던졌다.


주일우문학과 지성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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