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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새로운 세상을 꿈꾸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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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5호 8 면

충북 청주 예술의전당 지하 특별전시실에서 상영되는 윌리엄 켄트리지의 영상 작품 ‘노트 투워즈 어 모델 오페라(Note Towards a Model Opera’(2015). 중국 고대 문자를 배경으로 텍스트와 이미지를 3개 채널에 절묘하게 결합한 걸작이다.

바야흐로 가을. 가을의 시작인 9월은 미술과 함께 열린다. 다양한 비엔날레와 미술축제가 전국에서 거의 동시다발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1일 SeMA 비엔날레 ‘미디어시티서울2016’(11월 20일까지 서울시립미술관 등)과 제1회 직지코리아국제페스티벌(8일까지 충북 청주 예술의전당 등)을 시작으로 2일 광주비엔날레(11월 6일까지 비엔날레 전시관 등), 3일 부산비엔날레(11월 30일까지 부산시립미술관 등), 22일 2016창원조각비엔날레(10월 23일까지 용지호수공원 등), 29일 대구사진비엔날레(11월 3일까지 대구문화예술회관 등)가 이어진다.


유난히 무더웠던 올 여름을 이겨낸 예술적 결실이 눈앞에서 수확을 기다리고 있다. 태양의 에너지로 빨아들인 작가의 이글거리는 예술혼을 이제 감사한 마음으로 즐길 일만 남았다. 미디어시티서울2016의 백지숙 예술감독, 제1회 직지코리아국제페스티벌의 김승민 수석큐레이터와 함께 각각 전시장을 돌아보았다.

서울시립미술관 1층 로비에 설치된 남아공 작가 케망 와 레훌레레의 ‘우주의 또 다른 막간 궤도’(2016). 가로 약 10m 세로 약 6m 짜리 흑판에 8일간 분필로 그린 작품이다.

나스티비셔스 작가의 설치 및 비디오 작품.

에두아르도 나바로의 퍼포먼스 ‘말들은 거짓말하지 않는다’(2013).

나스티비셔스 작가의 ‘막’(2012), 나스티비셔스 작가의 설치 및 비디오 작품. 6채널 비디오, 12분7초.

나스티비셔스 작가의 ‘막’(2012), 6채널 비디오, 12분7초.

주황 작가의 ‘의상을 입어라’(2016), 사진·라이트박스, 각 190 x 65 cm

올해로 9회째인 ‘미디어시티서울 2016’은 서울시립미술관 전관(서소문본관·남서울생활미술관 전관·북서울미술관 일부,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일부)에서 펼쳐진다. 타이틀은 ‘네리리 키르르 하라라(NERIRI KIRURU HARARA)’. 일본 시인 다니카와 슌타로의 시 ‘20억 광년의 고독’에서 화성인의 활동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 것을 인용했다. 외계어 주문 같은 알쏭달쏭한 이 말에는 재난으로 점철된 현대인의 고단한 일상 너머로 새로운 세상을 추구하는 염원이 담겨있다. 국내외 24개국 61명/팀이 76점을 출품했다.


미술관 로비 1층에서 관람객을 맞는 것은 커다란 칠판 벽화다. 남아공 작가 케망 와 레훌레레의 ‘우주의 또 다른 막간 궤도’(2016)로, 가로 약 10m·세로 약 6m 짜리 흑판에 8일간 분필로 그린 작품이다. 남아공 역사를 되돌아보는 작업을 주로 해왔다는 작가는 특이하게 분필을 사용한 이유에 대해 “비영구적인 재료를 통해 시간과 변화에 대한 관심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안으로 들어가면 네덜란드 듀오 작가 빅 반 데르 폴이 만든 널찍한 네모 틀이 보인다. 시립미술관 소장품을 새로운 시선으로 재조명하는 자리다. SF소설가 정소연, 영화감독 장준환, 불문학자 윤경희 등 각기 다른 영역에서 활동하는 문화인 6명이 객원 큐레이터를 맡아 2주씩 자신들이 수장고에서 골라낸 작품을 선보인다.


왼쪽 끝으로 가면 어둠 속에서 이반 나바로의 두 개의 네온 작품이 시선을 붙든다. ‘무제(쌍둥이 빌딩)’(2011)다. 네온과 거울을 이용해 시각적 트릭으로 바닥이 보이지 않는 깊은 우물 같은 심연을 연출해냈다. 백지숙 예술 감독에 따르면 “어둠에 갇힌 빛”이다.


백 감독은 피에르 위그의 19분짜리 영상 ‘무제(인간가면)’(2014)를 추천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폐허가 된 유령 도시를 배경으로 사람 얼굴 모양의 가면을 쓴 원숭이가 등장하는 작품이다. “일본 전통 음식점에서 손님들에게 물수건을 가져다주던 원숭이를 섭외해 작품을 촬영했다고 합니다. 사람 가면을 쓴 원숭이가 아무도 없는 식당에서 습관적으로 손님들 시중을 드는 모습이 어찌나 기괴한지 우리에게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2층으로 올라가면 제인&루이스 윌슨 자매가 찍은 커다란 사진들이 눈에 띈다. 우크라이나 체르노빌 사고 이후 버려진 시설물, 영국 서포크 일대의 수소폭탄 실험실 등의 모습이다. 인간의 오만함에 대한 경종에 다름 아니다. 한쪽 벽면에 길게 걸려있는 각종 마구와 말 머리 인형은 에두아르도 나바로의 퍼포먼스용 도구들. ‘말들은 거짓말하지 않는다’(2013)를 연기하며 퍼포머들은 아주 느린 동작을 통해 온몸으로 말의 감각을 느끼고 그것을 보는 이에게 전한다.


그 맞은편에 설치된 푸른 얼룩의 매트리스와 베개, 그리고 24분 55초짜리 TV 영상 작품이 태국작가 코라크릿 아룬나논차이의 ‘웃긴 이름을 가진 사람들로 가즉 찬 방에서 역사로 칠하기 3’(2015)이다. 올해 비엔날레에서 ‘SeMA-하나 미디어아트 미술상’을 공동수상한 작품으로 태국 청년들의 다양한 삶, 몽환적인 자연환경, 도시의 뒷골목 등을 드론 등을 이용해 다양한 시선으로 풀어냈다.


3층에서 눈길을 끄는 작품은 주황 작가의 ‘의상을 입어라’(2016)였다. 마트 직원이나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처럼 감정노동을 하는 여성 노동자들의 쓸쓸한 표정을 통해 노동의 왜곡과 소외를 담아냈다.


나스티비셔스의 설치 및 비디오에는 ‘행복’이나 ‘신뢰’ 같은 인터넷 검색어에 상반되는 내용의 영상이 펼쳐진다. 매우 복잡하고 긴 영어 제목에 대해 작가는 “언어 놀이를 하듯 만든 것이므로 한국어로 번역을 할 수도, 할 필요도 없다”고 했다고 한다.


3층 가운데 공간에 마련된 크리스틴 선 킴 작가의 ‘기술을 요하는 게임 2.0’(2015)은 ‘SeMA-하나 미디어아트 미술상’ 공동수상작으로 벽에서 벽을 연결하는 선을 따라 특수 제작한 막대기를 대고 움직이면 소리가 들리는 인터랙티브 사운드 퍼포먼스 작품이다. 청각장애가 있는 작가는 소리를 듣고 말을 한다는 기본적인 행위가 기실 얼마나 정성을 들여야 하는 소중한 것인지를 작품으로 웅변한다. 무료. 매주 월요일 휴관.

청주 예술의전당 1층에 마련된 최정화 작가의 설치작 ‘마음’(2016)

료이치 쿠로카와의 3면 영상 작품 ‘언폴드(unfold)’(2016).

청주 예술의전당 광장을 에워싼 설치작품 ‘직지 월(Wall): 깨달음의 순간’.

론 아라드의 ‘직지 파빌리온’ 스케치.

신용일 작가의 흙글씨 작업 ‘SUNYATA 공(空)’(2011)

정식명칭이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인 『직지(直指)』는 1377년 청주 흥덕사에서 간행된 현존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이다. 구텐베르그의 42행 성서보다 78년이 앞선, 2011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도 등재된 ‘인류의 보물’이다.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하권’이 남아있다.


청주 직지축제와 유네스코 직지상 시상식이 올해부터 합쳐져 직지코리아국제페스티벌이 됐다. ‘직지’에 담긴 창조적 가치를 현대 예술로 풀어보자는 시도로 마련된 주제 전시의 제목은 ‘직지, 금빛 씨앗(JIKJI, THE GOLDEN SEED)’. 김승민 수석 큐레이터는 “주제어에 금속활자의 금빛에 무한한 가능성이 담겨있다는 의미를 실었다”며 “지식의 공유와 확산을 통해 인류의 패러다임을 바꿨다는 점에서 직지는 혁명”이라고 가치를 부여했다. 11개국 35개 아티스트 팀이 ‘직지’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신작을 대거 선보였다.


청주 예술의전당을 찾는 관람객은 우선 광장을 성벽처럼 에워싼 8000개의 활자 설치물을 통과해야 한다. 직지 하권에 있는 활자를 반투명 플라스틱 상자에 새겨 넣고 상자 안에 LED 조명을 설치한 ‘직지 월(Wall): 깨달음의 순간’이다. 그 옆으로 옛날 서책을 펼쳐 엎어놓은 듯한 모양의 ‘직지 파빌리온’이 보인다. 독일 출판사 ‘타셴’이 세계 3대 디자이너로 꼽은 론 아라드가 이번 행사를 위해 내놓은 작품이다. 행사 후에는 청주시가 소장해 직지의 가치를 알리는 시그니처 작품으로 활용할 예정이다.


예술의전당 건물 외벽과 1층 로비에 마련된 디자이너 안상수의 ‘알파에서 히읗까지’는 가장 오래된 글자 ‘알파’부터 가장 어린 글자인 한글의 ‘히읗’을 수미쌍관형으로 만들어 의미를 담아냈다.


전시실은 크게 7개의 섹션으로 구분했는데, 1층 로비는 이를테면 ‘머릿말’ 섹션이다. 전시의 의미를 요약하는 작품들을 모아 놓았다. 팔만대장경판이 소장된 해인사를 찍은 사진작가 배병우의 미공개 사진이 출품됐다. 설치미술가 최정화는 청주 시민들과 ‘마음’이라는 화두로 제작한 대형 만다라 작품과 ‘직지’의 글자 조각을 회오리처럼 움직이게 만든 설치 작품 ‘마음’ 등을 선보였다. 미디어 아티스트 이이남은 ‘직지’속 문구인 ‘구류손불(拘留孫佛)’과 ‘훈민정음’이 가루처럼 부서져 폭포처럼 아래로 쏟아져 내리는 미디어 작업을 내놨다.


계단 옆 유리창에 마치 스테인드글라스처럼 알록달록 처리된 작품은 필 돕슨과 브리짓 스테푸티스의 컬래버레이션 작품인 ‘구텐베르그 갤럭시’다. 인쇄문화가 유럽 사회에 미친 영향을 분석한 마샬 맥루한의 동명의 책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었다.


2층에서는 인쇄 문화와 활자의 발달 과정에서 직지의 의미를 역사적으로 살폈다. 죄를 사해준다며 판매한 인쇄물 ‘면죄부’와 구텐베르그 인쇄기로 직접 찍어내는 성경 요한복음 제 1장은 관람객의 흥미를 끌만한 코너였다.


직지의 가치를 해석한 작품 중에서는 김상진 작가의 물프린터 ‘인 비저빌리티 더 바이블(In Visibility - the Bible)’이 눈길을 끌었다. 물 위로 성경구절을 인쇄한 잉크가 천천히 번지는 모습이 묘한 여운을 남겼다.


직지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김 큐레이터는 그 단초를 예술과 과학의 융합에서 찾았다.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유럽입자물리학연구소(CERN)와 영국 리버풀의 뉴미디어 아트센터(FACT)는 올해부터 교환 아티스트 레지던시를 운영하고 있는데 이곳에서 미래를 연구하고 있는 예술가들의 작품을 이번에 전시합니다. 국내 관객들로서는 전혀 새로운 경험이 될 것입니다.”


우주인 헬멧같은 기기를 머리에 쓰고 잠자리·개구리·올빼미의 시선이 되어 숲속 여행을 즐기는 ‘마시멜로우 레이저 피스트’의 VR 작품과 아시아에서 처음 공개되는 료이치 쿠로카와의 ‘언폴드(unfold)’는 태양계 탄생에 대한 시각적 충격을 전해주는 작품들이다.


건물 지하 특별전시실에서 볼 수 있는 윌리엄 켄트리지의 영상 작품 ‘노트 투워즈 어 모델 오페라(Note Towards a Model Opera’(2015)는 중국 고대 문자를 배경으로 텍스트와 이미지를 3개 채널에 절묘하게 결합한 걸작이다. 성인 5000원, 기간 중 무휴. ●


서울·청주 글 정형모 기자 hyung@joongang.co.kr, 사진 전호성 객원기자·서울시립미술관·직지코리아조직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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