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박종기 【고려사의 재발견】 : 요약(60)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495호 1 면

왕건은 후삼국 전쟁의 향배가 걸린 고창(古昌*안동)전투에 승리하자, 승리에 협조한 김행에게 권씨라는 성을 주었다. 이어서 고창을 ‘동쪽지역이 평안하게 됐다’는 뜻의 ‘안동(安東)’이란 이름으로 바꾼다. 김행에게 권이라는 성과 함께 안동을 본관으로 주었던 것이다.

안동 김씨와 권씨·장씨 시조의 공덕을 새긴 비석. 이황의 '삼공신묘기'를 바탕으로 1805년 김희순이 비문을 지었다. 안동시 북문동에 있다. [중앙포토]

왕건이 남쪽지역을 정벌하기 위해 지금의 남한강에 이르자, 서목(徐穆)이란 사람이 ‘이섭(利涉:강을 건너는 데 도움을 주다)’했다고 해서 그곳을 이천(利川)군으로 명칭을 바꾼다(『고려사』 권56 지리1 이천군조). 이천을 본관으로 한 서씨 또한 이로부터 유래한다. 왕건이 지방의 유력자에게 성과 본관을 준 대표적인 예다.


?본관과 성이 일반인 차원에서 보편화된 건 고려왕조 때부터다. 『택리지(擇里志)』의 저자 이중환(李重煥ㆍ1690~1752)은 고려 때 비로소 중국의 씨족제도를 모방하여 성씨를 반포하면서 일반 사람들도 성을 가지게 되었다고 했다(『택리지(擇里志)』 ‘총론’).


전쟁이 끝난 940년(태조23)에는 ‘토성분정(土姓分定)’을 전국으로 확대해 실시한다. 태조는 ‘토성분정’을 시행한 940년에 전국의 군현 명칭을 개정한다. 이 조치는 본관과 성을 정한 토성분정 정책을 보완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태조 18년(935) (신라) 경순왕 김부(金傅)가 와서 항복하자, 나라를 없애고 그곳을 경주(慶州)라 하였다. (태조) 23년 경주의 관격(官格)을 대도독부로 삼았다. 또한 경주 6부의 이름을 고쳤다.”(『고려사』 권57 지리2 경주조)

고려 때 주민등록증 역할을 한 ‘준호구’. 소지한 사람과 배우자의 4대 조까지 본관과 성이 기록돼 있다.

왜 왕건은 이런 정책을 시행했을까? 왕건은 박씨와 김씨가 성골과 진골이 되어 정치·경제를 독점한 통일신라의 폐쇄적인 골품제를 무너뜨리고, 소외된 지방 유력층에 토성을 줌으로써 새 지배층에 편입시켜 신왕조 질서 수립에 도움을 얻고자 했다.


이 정책은 단순히 지방세력에 본관과 성씨를 부여하는 친족제도가 아니라, 반세기에 가까운 내란으로 분열된 지역과 민심을 통합하려는 고려판 사회통합정책이다. 학계에서는 이 정책을 ‘본관제(本貫制)’라 부른다.


958년(광종9) 과거제 시행은 본관과 성씨 사용이 일반인 계층까지 확산된 계기가 되었다. 1055년(문종9) ‘씨족록(氏族錄)’에 실려 있지 않은 사람은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게 하는 조치(氏族不付者 勿令赴擧; 『고려사』 권73 선거 과거)가 내려졌다. 초기에는 과거 응시 자격이 지방 유력층인 향리층 이상에게만 주어졌지만 과거가 시행된 지 100년이 지나면서 씨족록에 성씨와 본관이 등록된 일반인에게도 응시가 허용됐다. 그러면서 성씨와 본관이 확산되기 시작한다. 대체로 11세기와 12세기를 거치면서 노비를 제외한 일반 양인들이 지금과 같이 성씨와 본관을 갖는 게 보편화된다.

고려 때 주민등록증 역할을 한 ‘준호구’. 소지한 사람과 배우자의 4대 조까지 본관과 성이 기록돼 있다.

관대함과 엄격함은 나라를 다스리는 제왕에게 필요한 덕목이다. 이를 겸비한 제왕은 흔치 않다. 광종은 그것을 겸비한 군주였다. 외국인 관료를 우대한 건 광종의 관대한 통치의 일면을 보여준다. 반면에 광종이 호족 숙청과 과거제 실시로 정치판과 관료 시스템을 물갈이한 건 채찍과 같은 엄격한 통치의 일면을 보여준다. 당시 지배층 여론은 광종의 외국인 관료 우대 정책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광종의 형이자 선왕인 정종은 서경(평양) 군벌 왕식렴의 도움으로 즉위했다. 그 때문에 정종은 서경으로 천도해 왕식렴에 의지해 정치를 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광종은 호족 세력에 의지한 정종의 정치에 분명한 한계가 있음을 통감(痛感)했다. 광종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쌍기 등 중국계 귀화인 관료를 등용시켜 정치판을 물갈이하려 했다.


광종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호족 세력을 약화시키는 더욱 충격적인 조치를 취한다. 956년(광종7)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을 시행한 것이다. 호족들을 대상으로 노비 소유의 불법 여부를 가리겠다는 정책이다. “왕조 건국 당시 공신들은 원래 소유한 노비에다 전쟁에서 얻은 포로 노비와 거래를 통해 얻은 매매 노비를 갖고 있었다. 태조는 포로 노비를 해방하려 했으나 공신들이 동요할까 염려하여 그들의 편의에 맡긴 지 약 60년이 되었다. 광종이 처음으로 공신들의 노비를 조사하여 불법으로 소유한 노비를 가려내자, 공신들은 모두 불만으로 가득 찼다. 대목왕후(大穆王后·광종비)가 광종에게 그만둘 것을 간절히 말해도 듣지 않았다.”(『고려사』 권93 최승로 열전) 노비는 호족들에게 토지와 함께 당시 중요한 재산의 일부였다. 그런데 광종은 호족들이 불법으로 취득한 노비는 해방시키거나 원래 주인에게 되돌려주겠다고 나선 것이다. 호족의 군사·경제 기반을 약화시키려는 조치였다.


광종 숙청의 주된 표적은 당시 최대 군벌인 서경의 호족 세력이었다. 광종이 960년(광종11) 개경을 황도(皇都), 서경을 서도(西都)라고 이름을 고쳐 정종의 서경 우대정책을 버리고 개경 중심의 정치를 천명한 것도 그 때문이다.

충북 청주의 ‘용두사’ 터에 있는 철당간(왼쪽). 표면에 “준풍(광종의 연호) 3년( 962년·광종 13년)에 건립됐다”는 기록이 새겨져 있다. [사진 문화재청]

고려의 6대 국왕 성종(成宗·981~997년 재위, 960~997년)에 대해 고려 후기 유학자 이제현은 다음과 같이 평했다.

“(성종은) 종묘를 세우고 사직을 정했다. 학교 재정을 넉넉하게 해 선비를 양성했고, 직접 시험을 치러 어진 사람을 구했다. 수령을 독려하여 어려운 백성을 돕게 하고, 효성과 절의를 권장하여 풍속을 아름답게 했다. (중략) 뜻이 있어 함께 일을 할 수 있다는 말이 있는데, 성종이야말로 바로 그런 어진 군주(賢主)다.”(『고려사』 권3 성종 16년 10월)


성종이 고려 종묘와 사직의 완성, 인재의 양성과 발탁, 민생의 교화와 안정을 이룩했다는 점에서 현군(賢君)으로 평가한 것이다. 그에게 붙여진 묘호(廟號:국왕 제사 때 호칭)인 ‘성종(成宗)’은 한 왕조의 기틀이 되는 이른바 ‘법과 제도’를 완성한 군주에게 붙여지는 호칭이다. 조선의 법과 제도를 담은 『경국대전(經國大典)』(1485년)을 완성한 국왕을 성종(1469~1494년)이라 했듯이 고려의 성종 역시 그런 호칭에 걸맞은 군주였다.


성종은 고려의 역대 국왕 가운데 ‘어진 군주(賢主)’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치세술(治世術)은 무엇일까? 우선 성종은 즉위 직후 언로(言路)를 개방했다. 5품 이상 모든 관료에게 현안에 대한 의견을 올리게 했다. 그 가운데 성종의 귀에 거슬릴 정도로 성종을 비판한 28가지 조항의 최승로(崔承老)의 시무상소가 전해지고 있다.


즉위 직후 광종의 정책을 계승하려던 성종에게 최승로는 마뜩찮은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성종은 이같이 비판적인 인물을 재상으로 기용했다. 광종이 추구한 화풍정책의 한계를 보완하여 왕조의 면모를 일신하려 한 것이다. 군주들이 언로를 열다가도 따가운 비판에 마음을 닫는 경우가 다반사지만, 성종은 끝까지 마음을 열어 신하들의 비판을 듣고 정책에 반영했다. 인적 청산에 치중한 광종과 달리 성종은 제도 개혁을 단행하여 고려의 법과 제도를 완성했다. 즉 최승로 계통의 ‘화풍파’(중국 문물 도입을 주장하는 유학자 집단) 관료들을 통해 중국의 선진문물을 수용하고, 3성6부와 같은 정치제도 및 2군6위와 같은 군사제도를 완비했다. 또한 호족세력을 약화시키고 중앙정부가 직접 지방을 지배하도록 행정제도도 개혁했다. 성종은 이념 성향이 다른 인물들을 써 자신의 정치적 자산으로 만든, 독특한 인재 등용책을 구사한 군주였다. 그렇다고 다양한 세력의 틈바구니에 휘둘려 아무것도 하지 못한 무능한 군주도 아니었다. 그는 호족 중심의 낡은 정치와 관료 시스템을 물갈이하려 했던 광종의 개혁을 완성하는 것을 통치의 목표로 삼았다. 화풍정책을 계승해 중국의 선진문물을 수용함으로써 고려의 정치·경제·군사 제도를 개혁해 왕조의 체제를 새롭게 하려 했다. 인적 청산에 집중했던 광종과는 이런 점에서 달랐다. 위기의 시대에 소외된 정치세력은 외부의 적보다 더 무서운 적이 될 수 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진리다. 성종은 이런 평범한 진리를 받아들여 실천했다. 화풍 성향의 유교 관료집단과 국풍 성향의 관료집단을 함께 끌어안는 조화와 균형의 리더십으로 정국을 운영했다. 나라 안팎에 현안이 발생하면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해 나라를 위기에서 건져내고 왕조의 면모를 일신시켜 나갔다. ‘성종’이란 칭호에 걸맞은 군주였던 셈이다.?


- 박종기, 「고려사의 재발견」, 제322호 2013년 5월 12일, 제326호 2013년 6월 9일, 328호 2013년 6월 23일?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