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7인의 작가전] 환상 편의점 #3. 사랑의 묘약 (3)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기사 이미지

정현에게 생수에 탄 사랑의 묘약을 먹인 날로부터 사흘이 지났다. 그 사이 민영은 일이 좀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얼마 전부터 출근하기 시작한 패밀리 레스토랑에서도 접시를 세 장이나 깨뜨려서 싫은 소리를 들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는 24시간 내내 온 신경이 자신의 휴대전화로 쏠려 있었다.

정말 정현에게서 연락이 올까? 아니면 내가 먼저 전화해봐야 하는 건가?

하지만 정현에게서는 전화는커녕 문자 한 통 없었다. 그녀의 기대는 시간이 가면서 점차 사그라졌다. 마침내 사흘째가 됐을 때, 민영은 쓴웃음과 함께 탄식을 내뱉었다.

“그러면 그렇지.”

그런 엉터리 상술에 속은 게 부끄러웠다. 아무리 돈을 안 냈다곤 해도 사기당한 기분이 들었다. 사랑의 묘약이 든 병은 화장대 위에서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걸 보자 홧김에 집어 던지고 싶어졌다.

‘이까짓 것.’

민영이 막 병을 집어 들었을 때였다. 마침내 휴대전화의 벨소리가 울렸다. 그녀는 너무 놀라서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며 병을 떨어뜨렸다.

“아악!”

떨어뜨린 병이 바닥을 굴렀다. 다행히 병은 깨지지 않았고 내용물도 쏟아지지 않았다. 그런데 방금 분명히 병이 움찔하지 않았던가? 뭐라고 해야 하나. 그래, 마치 심장 박동이 뛰는 것처럼.

‘착각이겠지.’

민영은 고개를 젓고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내 남자’라는 세 글자가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정현이 분명했다.

‘아!’

민영은 제 입을 틀어막았다. 정말 효과가 있었던 걸까? 아니. 섣부른 기대는 금물이다. 그녀는 너무 반가워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전화를 받았다.

“응. 오빠.”

[ 잤니? ]

“아니. 누워서 책 읽고 있었어.”

[ 그래. 혹시 내일 시간 괜찮아? ]

내일은 마침 레스토랑 휴무였다. 민영은 아무 때나 괜찮다고 말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시간을 물었다.

“내일? 언제쯤?”

[ 저녁이나 같이 먹을까 해서. ]

“음……. 그때는 될 것 같아.”

[ 알았어. 그럼 내일 저녁 6시에 홍대입구역 6번 출구 앞에서 보자. ]

회색빛이던 세상이 순식간에 분홍빛으로 변했다. 민영은 날아갈 듯한 기분이 되었다. 그녀는 던져버리려던 사랑의 묘약 병을 들고 소중하게 어루만지다가 화장대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잠시 망설이더니 이내 다시 핸드백 속에 넣었다.

“쯧쯧.”

환상 편의점의 점원이 혀를 찼다. 그는 편의점 카운터 안쪽의 의자에 앉아서, 금전 출납기에 부착되어 있는 작은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 모니터에는 민영의 모습이 그대로 비쳤다. 화질도 매우 깨끗하고 또렷했다. 그는 민영을 향해 말하듯 중얼거렸다.

“묘약의 효과는 확실한 겁니다. 그건 예전에 오베론이 수하 요정을 시켜 아테네 청년의 눈에 바르게 했던 꽃 즙을 개량한 거니까요. 다만, 거기에는 복용량을 정확하게 지켜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있어요. 당신이 그걸 왜 챙겨두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리석은 선택을 하지 않길 바라요.”

그러나 얼핏 염려하는 것 같은 점원의 목소리에는 묘한 기대가 어려 있었다.

민영과 정현은 몇 개월 만에 둘이 함께 저녁식사를 했다. 정현은 마치 연애 초기의 다정하던 그로 돌아간 듯했다. 그는 민영의 근황을 묻고 잔소리가 심한 레스토랑 점장을 함께 흉봤다. 물과 피클 따위를 챙겨주고 다정한 눈빛으로 말없이 쳐다보기도 했다.

그랬다. 그의 이런 모습이 미치도록 좋았다. 평소에는 무뚝뚝하고 냉정하지만 그녀와 둘만 있을 때 보여주는 다정한 일면이 그를 떠날 수 없게 만들었다. 민영은 한없이 행복하면서도 문득문득 불안해졌다.

‘갑자기 왜 이렇게 잘해주는 거지? 정말 사랑의 묘약이 효과를 본 걸까? 아니면 영영 헤어지기 전의 마지막 선물 같은 건가…….’

식사를 마치고 후식으로 나온 커피를 마시고 있을 때였다. 정현이 민영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 보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민영아.”

“응?”
민영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건 정현이 뭔가 중요한 말을 하려 할 때의 행동이었다. 일단 그가 이런 식으로 내뱉은 말은 절대 철회한 법이 없었다. 민영과 사귀겠다고 부모님께 통보할 때도 그랬고 외무고시를 보겠다고 선언할 때도 그랬다.

“나…….”

정현이 막 입을 연 직후, 그의 스마트폰 벨이 울렸다. 액정 화면을 본 정현의 표정이 흔들렸다. 반사적으로 그쪽으로 시선을 준 민영도 두 글자의 여자 이름을 보고 말았다. 서린.

기사 이미지

민영은 정현이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짐작이 갔다. 저 서린이라는 여자와 만나야겠으니 오늘이 마지막이라거나, 저 여자와 결혼하겠다는 말일 테다. 그래서 미안하니까 잘해준 거겠지.

‘최악이네.’

한편으로는 그의 흔들리는 표정에 한 가닥 기대를 걸고 싶었다. 일단 결정을 내리면 늘 단호한 그가, 저런 표정을 짓는 건 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래, 약 덕분일 것이다. 그러는 사이에도 전화벨은 계속해서 울리고 있었다. 조용한 레스토랑의 음악을 뚫고 월광 소나타가 울려 퍼졌다. 다른 손님들이 슬쩍슬쩍 눈치를 주기 시작했다.

“오빠.”

민영의 부름에, 정현은 멍하니 그녀를 쳐다보았다.

“오빠. 혹시 그 서린이라는 사람 때문에 그런 거야? 나한테?”

그는 민영의 질문에는 대답 않고 스마트폰을 들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 잠깐 통화 좀 하고 올게.”

그가 나간 빈자리를 바라보던 민영의 눈에 어떤 열기가 떠올랐다. 그녀는 다급히 핸드백을 뒤져서 사랑의 묘약을 꺼냈다. 그리고 그가 남긴 커피에 망설임 없이 부었다. 얼추 한 모금 정도 될 양이었다. 커피가 많아진 것처럼 보일까 봐 그 이상은 붓지 못했다.

‘일주일에 한 방울? 아니. 그거로는 모자라.’

한 방울로는 그의 마음을 잠시 흔들리게 만들었을 뿐이다. 이제 서린이라는 여자가 있다는 사실까지 알았으니 더 강한 약효가 필요했다. 그는 분명 망설이고 있었다.

잠시 후, 정현이 돌아왔다. 민영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리에 앉아 그를 기다렸다. 맞은편에 앉은 그는 식은 커피를 단숨에 쭉 들이켜고 말했다.

“민영아. 오늘은 일단 가자. 다음에 얘기할게.”

말하는 정현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목소리도 미미하게 떨렸다. 그는 뭔가 심각한 갈등에 사로잡힌 듯 보였다.

민영은 민영대로, 서린이라는 여자와 사랑의 묘약에 대한 생각 때문에 별다른 대꾸를 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그 여자에 대해 더 추궁할 마음도 안 들었다. 괜히 정현의 심기를 건드려서 그녀를 택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둘은 그렇게 어색한 분위기로 헤어졌다.

이튿날 저녁, 레스토랑 일을 마친 민영이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왔을 때였다. 그녀는 제자리에 우뚝 멈춰서고 말았다. 정현이 그녀의 원룸이 있는 다세대 건물 앞에 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녀는 정현의 담배가 예전에 피우던, 냄새 독한 서양 담배로 되돌아갔음을 눈치챘다. 초조해 보이는 눈빛에, 턱에는 수염이 거칠하게 자라 있었다.

“오빠! 어쩐 일이야?”

민영을 본 정현은 담배꽁초를 버리고 발로 비벼 껐다. 놀라움 반, 반가움 반으로 다가서는 민영을 향해 그가 불퉁하니 말했다.

“어디 갔다 이제야 오는 거야?”

“어? 나 일한다고 했잖아. 레스토랑에서.”

“무슨 놈의 레스토랑이 이렇게 늦게 끝나?”

“미안해. 라스트 오더를 받고 좀 늦게까지 식사한 손님이 있어서 퇴근이 늦어졌어.”

애초에 민영은 정현이 오늘 찾아올 거라는 언질조차 받은 적이 없었다. 그러니 사과할 이유도 없다. 그래도 그를 기다리도록 한 게 미안했다. 민영이 그의 손을 양손으로 살며시 감쌌다. 언제부터 밖에 서 있었는지 손이 얼음덩어리처럼 싸늘했다.

“추웠지? 얼른 들어가자.”

정현의 표정이 스르르 풀렸다. 그는 민영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순간, 그녀는 직감했다. 정현이 자신에게 돌아왔음을.

‘사랑의 묘약은 진짜였어!’

집에 들어온 민영은 서둘러 코트를 벗고 옷을 갈아입었다. 레스토랑에서 어깨너머로 배운 솜씨를 발휘해 간단한 야식을 만들었다. 정현은 여태 너 기다리다가 저녁도 못 먹었다며 걸신들린 듯이 음식을 먹어치웠다.

그런 그를 보면서, 민영은 가슴이 아릴 정도로 행복했다. 한 번 떠났다가 돌아온 행복이라 더욱 절절했다. 그녀는 죽어도 이 행복을 놓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 상대가 누구든, 그 서린이라는 여자도 포함해서.

“아아, 잘 먹었다.”

야식을 먹어치운 정현이 갑작스레 민영을 덮쳤다. 민영은 기쁜 반면 당황스러웠다. 그는 결코 이런 식으로 정사를 치르는 법이 없었다. 양치를 하고 깨끗이 샤워를 한 다음, 오직 침대에서만 관계를 가졌다.

“오빠. 잠깐만. 나 종일 일하고 샤워도 못했어.”

“괜찮아. 그게 더 좋아.”

민영은 잠시 몸을 비틀다가 포기하고 허리를 들었다. 정현은 어느 때보다 격정적이었다. 둘이 처음 관계를 가졌던 날보다도 더했다. 그는 거칠게, 끊임없이 민영을 원했다.

“사랑해. 넌 내 거야.”

“아아, 오빠…….”

민영은 고통스러운 환희에 젖었다. 한창 몸부림을 치던 그가, 별안간 아무 예고도 없이 민영의 어깨를 깨물었다. 까득. 민영의 귀에 제 살이 씹히는 소리가 울릴 정도로 강도가 셌다. 그녀는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목구멍 안으로 삼켰다. 잠깐의 고통을 못 참아서 이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실컷 욕망을 채운 정현이 침대로 가 길게 늘어졌다. 공부하는 와중에도 단련을 게을리 하지 않은 근육질의 몸이 땀에 젖어 번들거렸다. 민영도 그 옆에 누웠다. 네 번? 다섯 번? 몇 차례나 절정에 올랐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둘은 잠시 천장을 바라보면서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다 호흡이 진정되자 고개를 돌려 마주 보고 웃었다.

정현은 늘 하던 대로 곧장 샤워실로 향하는 대신, 엎드린 채 민영의 몸을 어루만졌다. 그의 손이 어깨에서 멎었다. 깨문 자국이 선연하게 나 있었다. 그는 미안한 기색으로 말했다.

“미안. 아팠지?”

“조금. 괜찮아.”

“갑자기 널 잡아먹고 싶더라고.”

정현이 가볍게 던진 말에 민영은 흠칫했다. 농담이라는 걸 알면서도, 순간적으로 이상한 뭔가를 느꼈다. 마치 사람이 아니라 맹수와 함께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기사 이미지


 작가 소개  
    명지대학교 문예 창작학과 졸업
    단행본 <문답 무용>, <파이널 에볼루션> 출간
    <도전!웹 소설 쓰기> 공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