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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한 금요일] 모딜리아니 경매 나오자 류이첸 “1980억원” 전화로 입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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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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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미술의 꽃’은 암울한 시절 피어났다. 미국 증시의 폭락(1929년 10월 24일)으로 대공황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뉴욕현대미술관(MoMA·모마)이 문을 열었다. ‘석유왕’ 존 록펠러의 부인 애비의 공이 특히 컸다. 록펠러 가문은 용지를 비롯해 미술관 건립과 유지에도 거액을 내놨다. 2004년 9월 모마는 4년간의 증·개축 공사를 마치고 재개관했는데 소요된 비용의 82%를 록펠러 가문을 비롯한 순수 기부자들의 모금으로 충당했다. 실업자가 1300만 명에 달하는 대공황 시기에 5주 동안 5만 명의 관람객이 몰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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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 피카소의 ‘아비뇽의 여인들’을 비롯한 잭슨 폴록, 에드워드 호퍼, 조지아 오키프의 작품 등 서양 미술사의 보물이 가득하다. 제1,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유럽에서 근대 미술작품이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던 시절 미국 컬렉터들이 작품을 사들인 덕이다.

치바이스 수묵화도 718억원에 사
중국 현대회화 최고가 기록 경신
왕중쥔, 345억짜리 ‘피카소’ 구입
타이캉생명은 소더비 최대주주로
중화주의 탈피, 전 세계로 시야 확대
올 미술시장 35% 차지, 미국 추월

모마뿐만이 아니다. LA 카운티 미술관과 게티 미술관 등 세계적인 미국 내 사립 미술관에는 미국 자본가들의 손길이 묻어 있다.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필라델피아 미술관 등 공립 미술관의 소장품 역시 대다수가 부유한 개인 컬렉터들이 기증한 것이다.

뉴욕대 미술사학자인 조너선 브라운 교수는 “미국 컬렉터들이 사들인 작품이 결국 미술관에 기증돼 모두를 위한 공공 자산이 됐다”며 “컬렉터가 시장에서뿐 아니라 미술사적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말한다. 세계 미술의 중심이 유럽에서 미국으로 빠르게 이동한 데는 이런 미술관의 역할이 컸다.

하지만 근래 미국·유럽의 미술 시장은 2008년 금융위기로 침체기를 겪었다. 얼어붙은 미술 시장에 활기를 불어넣은 건 차이나머니였다. 지난해 11월 9일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모딜리아니의 ‘누워 있는 나부(Nu Couch´e)’가 낙찰 예상가인 1억 달러를 훌쩍 뛰어넘어 1억7040만 달러(약 1980억원)에 낙찰됐다. 세계 미술품 경매 사상 둘째로 높은 가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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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누가 샀을까. 중국인의 미술품 경매 낙찰액으로는 최고가를 전화로 부른 이는 바로 상하이의 금융 재벌로 꼽히는 선라인그룹의 류이첸(劉益謙) 회장이었다. 그는 “세계적 박물관들이 모딜리아니 누드화를 많이 소장하고 있다. 이제 중국 미술품 애호가들이 굳이 외국에 가지 않아도 중국 땅에서 훌륭한 예술품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구매 동기를 밝혔다.

그의 관심사는 현대 미술품에서 중국 골동품까지 아우른다. 최근 최고가를 기록한 중국 미술품 대부분을 그가 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2세기 송나라 왕조의 꽃병을 1470만 달러(약 160억8700만원)에, 홍콩 소더비 경매에서 명나라 성화제(成和帝) 때 제작된 8㎝에 불과한 술잔을 2억8100만 홍콩달러(약 367억원)에 낙찰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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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화단을 대표하는 치바이스(齊白石)의 수묵화 ‘송백고립도(松柏高立圖)’는 베이징 경매에서 4억2550만 위안(약 718억원)에 구입해 중국 현대회화 최고가 기록을 경신했다. 지난해 6월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서는 한국 작가인 김환기의 1950년대 작품 ‘푸른 산’을 40여 차례 경합 끝에 1384만 홍콩달러(약 19억8000만원)에 낙찰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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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영화업계의 거물 화이브러더스의 왕중쥔(王中軍) 회장도 미술품 경매 시장을 쥐락펴락하는 큰손이다. 지난해 11월 미국 소더비 경매에서 빈센트 반 고흐의 명작 ‘정물, 데이지와 양귀비 꽃병’을 6180만 달러(약 672억원)에 낙찰받았다. 올해에도 뉴욕 소더비 경매에 나온 파블로 피카소의 ‘소파에 앉은 여인’을 2990만 달러(약 345억원)에 사들였다. 중국 부동산 갑부인 왕젠린 완다그룹 회장도 2013년 크리스티 경매에서 피카소의 1950년 작품 ‘클로드와 비둘기’를 당시 예상가격보다 두 배 이상 높은 2820만 달러(약 326억원)에 매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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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국제 미술시장 분석회사 아트프라이스는 최근 보고서에서 “중국 미술계와 컬렉터들이 ‘중화주의’를 탈피해 전 세계의 미술시장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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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는 세계적 미술품 경매회사인 소더비에도 영향력을 미칠 수 있게 됐다. 지난달 중국의 타이캉(泰康)생명보험이 소더비의 최대 주주로 등극하면서다. 중국 매출 5위인 타이캉생명은 소더비의 지분 13.5%를 2억3300만 달러(약 2611억원)에 매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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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둥성 타이캉 회장은 90년대부터 홍콩 소더비를 출입하며 미술품 경매에 대한 열정을 나타낸 인물이다. 천 회장은 마오쩌둥(毛澤東) 전 주석의 외손녀 쿵둥메이(孔東梅)의 남편으로 현재 생명보험회사(타이캉)와 미술경매 회사(자더)의 대표를 맡고 있다. 현대 중국 전환기의 작품을 주로 수집하는 천 회장이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천이페이(陳逸飛)의 1972년 유화 ‘황하송(黃河頌)’이다. 72년 피아노협주곡 ‘황하’를 주제로 한 선전화다. 총을 든 전사는 무산계급을 상징하며 공산 해방을 위해 조국과 민족의 찬가를 노래하는 듯한 애국주의 작품에 속한다.

자더의 모회사인 자더국제는 타이캉의 지분 23.77%를 보유한 최대주주다. 그가 약 25년 전에 설립한 중국 최초의 경매회사 자더는 지난해 약 5억5000만 달러의 수익을 기록했다. 자더의 성공 배경에는 중국 내 미술품 시장의 폭발적인 성장이 있다. 중국의 순수미술 경매액은 지난 8년간 세 배 성장해 지난해 약 49억 달러를 기록했다. 아트프라이스에 따르면 중국(홍콩 포함)은 올해 상반기 전 세계 순수미술 시장 매출액 65억3000만 달러(약 7조3175억원) 중 35.5%인 23억2000만 달러를 차지하며 미국(17억 달러)을 제치고 1위에 올랐다.

컨설팅 전문기업인 펜쇼엔베르란트어소시에시츠 회장 마크 펜은 중국의 미술시장은 이제 막 싹트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경제가 번창하는 곳에 예술도 있다. 이제 막 싹트기 시작한 미술 공동체에 처음부터 관여해 유리한 입장에 서고 싶어하는 사람이라면 중국은 최적의 장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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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젊은 작가 키우는 애드리언 쳉(37)

2010년 중국 최초의 무국적 비영리단체인 ‘K11’을 세워 중국 신진 작가들을 세계로 진출시키고 있다. 중국 국립박물관재단 이사, 뉴욕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위원, 런던 왕립미술관 신탁관리자 등 다양한 직함으로 세계 미술시장에서 활동하고 있다. 사진 속 그림은 쳉이 후원한 중국 작가 장언리의 작품(pub 5.1999년).

임채연 기자 yamfl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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