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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4·19 반년전 이박사에 하야 권고"|4·19당시 미국공사「마셜·그린」의 증언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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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아이젠하워」미대통령은 4·19가 일어나기 반년전인 59년 여름 친구인「월터·저드」하원의원을 한국에 파견, 이승만박사에게 후계자를 키운후 하야하라고 권고했다고 4·19와 5·16당시 주한 미국대사관 공사와 대리대사를 지낸「마셜·그린」씨(70)가 최근 중앙일보와의 회견에서 밝혔다.
「그린」씨는 그와같은 메시지는 서면이 아닌 구두로 전달되었다고 밝히고 이에대한 이박사의 반응은「웃음섞인 거부」였다고 말했다.
「그린」씨는 또 이박사와 미국의 관계가 4·19를 앞두고 냉각되어 있었다고 밝히고 그 주된 이유는 이박사가 평화선을 넘어오는 일본어선을 계속 나포함으로써 동아시아의 두 우방인 한국과 일본관계를 접근시키려는 미국의 의도를 『불가능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4·19와 5·16에 관해서는 여러 관련자들의 증언이 이미 소개되었지만 제3의 목격자인 당시 미국대사관측 증언은 아직 전해진적이 없다.
본사 장두성 주워싱턴특파원은「그린」씨를 만나 이 대사건의 개인적 회상을 들었다. 4 ·19당시 미국측 입장을 취재하기는 쉽지가 않았다.
조지아주 아틀랜타시에서 은퇴생활을 하고있는 78세의「매카나기」당시 대사는『너무 오래전의 일이어서 잘 기억이 안난다』는 이유로 회견을 사양했다. 그는 그대신「그린」씨를 만나보는게 어떠냐며 주소를 알려주었던 것이다.
워싱턴시 19가에 자리 잡은「인구위기 위원회」라는 국무성 자문기관에서 고문으로 봉사하고 있는「그린」씨는 왕년의 모습에 비해 약간 수척했으나 기억력은 놀라울 정도였다. 4·19를 전후한 중요사건의 날자는 물론 심지어 이화장도「플럼트리 퍼빌리언」(P1um Tree Pavilion)이라는 영어이름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4·19가 있은지도 이미 26년이 지났읍니다. 그 정도의 시간적 .거리를 두고 현장에 있었던 사람으로서 그 거대한 봉기의 역사적 의의를 어떻게 보십니까?
▲어떻게 답변해야될지 잘 모르겠군요. 우리는 그 당시 이승만박사가 전성기를 이미 넘어섰다는 점을 아주 강력하게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분은 과거는 잘 알고 있었지만 미래를 헤쳐나갈 능력을 갖지 못한 것 같았읍니다.
60년3월 총선에는 부정행위가 많았어요. 마산사태가 국민들에 불을 붙였지요. 미국대사관에서는 이와같은 사태에 경각심이 높았읍니다.
미국은 이박사및 자유당 정권과 밀접하게 접근해 있었기 때문에 이 시기에 우리가 한국 국민편에 서지않으면 한국 국민들의 신뢰를 잃게 될것이라고 걱정했었습니다.
미국 정부가 그렇게 판단했다는 이야기가 아니고 대사관이 그렇게 생각했다는 이야깁니다. 그 시절에는 외국공관에 나가있는 외교관들이 요즘에 비해 정책 결정에 훨씬 더 큰 재량권을 갖고 있있어요.
한국 경찰이 데모대에 대해 잔학행위를 하고 있다는 보도가 연일 신문에 보도되자 대사관은「이유있는 불만」(justifiable grievances)이란 용어를 쓰기 시작했읍니다. 이 용어 하나로써 미국대사관은 즉각 이정권편이 아닌 학생편 서있다는 인상을 풍길수 있었읍니다.
꼭 그런 의도로 이 용어를 쓴것은 아니지만 겅결가 그렇게 된것이지요. 우리는 이정권에 대해 국민들의「이유있는 불만」을 해소해 줌으로써 민주화 도정으로 되돌아가 사태가 폭발하는것을 막아야 된다고 요구했읍니다.

<이박사, 일본만 비난>
우리는 탄피가 눈에 박힌채 죽은 김주열군의 처참한 모습이 신문에 보도되었을때 이 사진이 전국적인 봉기를 몰고 오리라는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정부가 사태를 완화시키기를 바랐지만 그렇게는 되지않았어요.「매카나기」대사는 거듭 이박사를 찾아가 면담을 했으나 이박사는 과거속에만 묻혀 있었습니다. 이 면담에 나도 동석했었읍니다.
이박사는 일본의 악랄성만 이야기할뿐 다른곳으로 화제를 돌리기가 어려웠습니다. 우리는 네번 이박사를 면담했는데 그때마다 화제의 90%는과거에 관한 이야기였어요.
과거에 관한 이박사의 기억력은 지극히 정확했습니다. 1900년, 1910년에 일어난 일들을 소상하게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시기가 현재에 가까와 올수록 현실과 동떨어진 인식을 하고있었습니다. 분명 그는 한 국가를 운영할 능력을 잃고있는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런 판단을 우리가 내릴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한국 국민들이 판단할 문제였지요.
-한국인들 사이에서 이박사에 대한 평가는 그가 독재자라는것과 인의 장막에 둘러싸여 현실감각을 잃은 옹고집의 노인이라는 두 극단적인 이미지 사이에 놓여 있습니다. 외국인으로서 그때 본 이박사를 어떻게 평 하십니까?
▲나는 두번째 이미지쪽이라고 봅니다. 이박사는 과거 한국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자유의 투사였고 필수적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권좌에서 물러났어야 했습니다. 후계자를 키운후 물러났어야지요. 그러나 그러지 않았읍다.
-그렇다면 귀하는 3·15 부정선거가 이박사 몰래 이기붕씨등 자유당 간부들에의해 자행되었다고 보는겁니까?
▲글쎄, 나로선 알수 없어요. 이기붕씨의 책임이 더 크겠지요. 이박사는 명령만 내리고 자기 명령이 어떤 형대로 수행되는지는 상관않는 분이었으니까요. 명령 받은 사람들은 자기들 멋대로 이박사의 명령을 해석했습니다. 경무대 참모들과 이기붕씨는 자기들 마음대로 이박사의 지시를 수행했을 것입니다. 나는 이박사가 부정선거의 구체적 방법까지 지시하지는 않았다고 봅니다.

<"이기붕의 책임 커">
4·19가 폭발하기까지 미국은 어떤 영향력을 행사했습니까? 미대사관은 공식적으로 이박사에게 압력을 넣기 이전에 이미 이박사가 취하기를바라는 개혁 목록을 제시했었다는 설이 있는데?
▲내가 한국에 부임하기전부터 젊은 정치인을 키워 권력을 이양하는것이 한국의 먼 장래를 위해서나 이박사 자신에 대한 역사적 평가에 있어서나 좋을것이라는 건의를 극히 외교적이고 우호적 방법으로 전달했었죠. 또 59년 여름에는 이박사및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친한 친구인「월터·저드」하원의원이 서울을 방문, 이박사에게 같은 권고를 한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런데 이박사는 빙긋이 웃으면서 이 권고를 거부했읍니다.
-「매카나기」대사가 4월21일 이박사에게 하야를 권고하기 훨씬전에 미국대사관은 경무대에 개혁건의안이 적힌 일종의 최고상을 보낸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게 사실입니까? 개혁내용은?
▲솔직이 말해 잘 기억이 안납니다. 우리가 개혁해야할 항목들을 문서로 작성한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서면을 이박사에게 전달했는지는 알수없어요. 아마 전달안했을 것입니다.
-어느 싯점에서 이 메모가 씌여졌읍니까?
▲3월이었던것 같아요.
-이박사의 하야발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것은 25일에 있었던 서울각대학 교수들의 시위였습니다. 그런데 이 교수들의 시위를 미국 대사관측에서 종용했다는 설이 있었습니다. 사실인가요?
▲사실이 아닐것 같습니다. 그런 일에 내가 개입했었다는 기억이 없어요. 지금 기억을 더듬고 있는데-이박사가 하야한 날이 26일이던가?
-그날 하야성명을 냈지요.
▲맞습니다. 각급학교의 시위가 계속되고 있었지요. 우리는 이 모든 데모와 무관했어요. 무관하고 말고-.
-「저드」하원의원이 이박사에게 전했다는 메시지는 하야를 종용한것인가요, 아니면 개혁을 종용한것인가요? 미국이 이박사에 대해 물러나야한다고 판단한 시기는 어느 시점입니까?
▲「저드」의원은 서면 메시지를 전달한것이 아니고 친구로서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 당시 몇가지 사건때문에 미국과 이박사의 관계는 냉각되어 있었어요. 그중 하나가 일본어선 나포사건입니다. 이박사는 나포활동을 계속할 의도였어서 우리는 이에대한항의를 연거푸 했어요. 우리는 동아시아의 두나라 (한일) 가 관계를 개선할것을 크게 희망해왔는데 어선나포가 그걸 불가능하게 만들었던것입니다.

<김주열사진 큰 충격>
이것이 주요 문제였고-. 우리가 언제 이박사가 퇴진해야겠다고 판단했느냐고 물었던가요? 우리는 그런 식으로 생각한적은 없습니다. 4월26일 이전에는 그런 싯점이 없었어요. 그런데 26일, 우리는 이박사가 물러나야겠다고 생각했읍니다.
다시 뒤로 돌아가서-. 나는 마산사태가 전환점이었다고 말했는데 4월11일 김주열의 사진이 보도됨으로써 전국이 돌아선것입니다. 신문사상에서 이 기사만큼 한나라의 운명을 좌우한 예는 없다고 봅니다.
미국 대사관에서도 충격이 컸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관여하고 있는곳에서 엄청난 잔학행위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깨닫게 된것입니다. 우리는 한국의 우방으로서, 7만2천명의 미군이 주둔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한국의 명성은 곧 우리의 명성이며 양자는 서로 부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생각을 했던것입니다.
미국은 그때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태에 많은것이 걸려있었으며 사태는 한미관계를 엄청난 위기로 몰고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지요. 최근 필리핀 사태에서 우리는 필연적으로 4·19때와 필리핀사태를 비교하게 되었습니다. 과연 미국은 4·19때 이박사의 하야결정에 어떤 영향력을 행사했을까? 미국은 그때도 이박사에게 하와이 망명약속을 내걸고 하야를 종용했던가요?
▲아주 재미있는 질문입니다. 4·19때는 미국대사관이 미국정부보다 더 적극적으로 활동했읍니다. 대사관이 앞장서고 미국정부는 사후승인을 하는식이었지요. 필리핀에서는 대통령이 스스로 개입했고 상원과 외교외원회가 개입했어요. 그러나 4·19때는 워싱턴에서는 아무도 개입하지 않았습니다. 미국대사관 독자로 한것이지요.
필리핀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세계언론이 크게 취급했고 우리는 필리핀정부와 대립되는 입장에서 한쪽 편을 든 셈이지요.
그러나 한국에서는 경우가 달라, 우리는 이박사에 대항하는 어느 누구도 지원하지 않고 있었읍니다.

<"병력 철수하시오">
우리가 논의한 골자는△정의가 회복돼야하고△유혈사태를 피할수 있어야하며△한국정부가 이번 선거는 잘못된것이라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는것△한국정부는 매우 어려운 위기에 직면해 있다는 것이었어요.
여야간에 모종의 타협책이 나와야할 절박한 상황이었지만 우리는 이박사를 대적할 어느 누구도 지원하지는 않고 있었읍니다.
우리는 어떤 결정을 내리지 않을수 없었으나 결정이 늦어져 4월26일 아침에 가서야 이박사가 하야해야한다는 생각을 하게된거죠. 수천명의 젊은이가 희생될지도 모르는 대립상황과 「매카나기」대사와 김정렬국방장관이 사태와 관련, 이박사를 만나고있었던것이 결정이 지체된 이유였죠.
「매카나기」대사와 김장관은 이박사에게「하야」하라는 말은 쓰지 않았지만l 발포를 중지하고 벌어질지도모를 모종의 사건을 촉발시키지 않도록 해야한다고 설득하고 있었습니다. 「매카나기」대사가 김씨와 경무대를 방문해 이박사와 얘기할때 『대통령각하, 사임하셔야 합니다』 라는 식으로 말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대통령각하, 병력을 철수시키셔야 합니다. 각하께서는 국민들이 새 질서가 도래하고 있음을 인식하고 제반문제를 각하와 토의하고자 원하고 있음을 분명히 아셔야합니다』라고 말했다지요.
-그날이 4월26일인가요.
▲그렇습니다.
-이박사가 하야성명을 내기 전이었겠죠.
▲그래요. 그후에 이박사는 성명을 발표, 발포 중지는 물론 자신은 사임하겠다는 뜻을 표명했습니다. 이박사 본인이 그렇게 말한겁니다.
내 기억으로는「매카나기」대사가 경무대로 다시 들어가고 우리는 라디오를 들었어요. 라디오방송으로 우리는 발포가 중지되고 학생시위도 중단됐으며 경호병력과 시위자들 사이에 대표자회담이 열렸다는것을 알았읍니다.

<필리핀 사태와 달라>
이 회담에서 정치적 해결책이 나올것으로 생각됐어요. 다시 말하면 데모대들이 그들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죠. 이같은 사태진전은 이박사가 물러나는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됐습니다. 실제 시간이 흐른뒤 같은날 이박사는 하야하겠다고 발표했어요.
-이박사의 하야는 미국무성의 권고로 이루어진 것인가요 아니면 이박사 스스로 결정했는가요.
▲당시 우리들은 워싱턴과 계속 연락을 취하고 있었으며 일련의 사태발전을 보고했던 것으로 썽각됩니다. 그러나 26일 아침에 벌어졌던 사태는 너무나 빨리 진전돼 이대통령의 하야에 관해서 워싱턴과 상의할 겨를이 없었어요. 하야는 이대통령 자신에 의해 결정됐읍니다.
내가 연관됐기 때문에 잘 압니다. 그때의 상항을 다시한번 정리해보죠.
나는 26일아침 5시30분 서울거리를 차를 타고 다녔는데 다시 데모가 시작되고 있는것을 볼수있었읍니다. 나는 황급히 대사관저로 가서 직원들에게 대사와 만나야겠으니 대사를 깨우라고 했읍니다.
잠옷 차림으로나온 대사에게 밖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황을 얘기했어요. 대사는 곧 전화를 하겠노라고 했는데 곧 이어 김정렬장관에게서 대사에게 같은 상황의 전화가 왔어요.「매카나기」대사와 김장관은 즉석에서 이대통령을 면담하기로 결정했던겁니다.
-그때까지 이대통령에게 하와이로의 정치망명을 권하지 않았다는 얘기입니까.
▲그래요. 그런 얘기는 없었어요. 이대통령은 그날 늦게 사임의사를 표명 했지요. 이제는 이박사가 언제 경무대를 떠나 이화장으로 갈 것인가하는 문제가 남았습니다. 그런데 이박사는 걸어서 이화장으로 가길 원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각종 시위를 유발시킬수도 있었기 때문에「매카나기」대사는 이박사에게 도보로 이화장에 가지 않도록 설득 했어요.
이박사가 이화장으로 옮긴후에는 그를 하와이로 망명시키되 시민들의 시위를 유발하지 않는 방법으로 추진하는 문제가 대두됐읍니다.
결국 이박사는 우리들의 도움으로 김포공항을 통해 하와이로 망명했습니다. 이같은 당시의 상황은 최근의 필리핀상황과 유사하긴 하지만 많은점에서 필리핀과 한국은 다르다는게 제 생각입니다. 장두성 워싱턴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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