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분수대

서태지, 시대유감, 재난영화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박정호 기자 중앙일보 수석논설위원
기사 이미지

박정호
논설위원

‘정직한 사람들의 시대는 갔어. 숱한 가식 속에서 오늘은 아우성을 들을 수 있어.’ 1996년 서태지가 노래했던 ‘시대유감’의 일부다. 서울 LG아트센터에서 공연 중인 창작 뮤지컬 ‘페스트’에 등장한다. 프랑스 소설가 알베르 카뮈의 원작에 ‘문화대통령’ 서태지의 음악을 입혔다. 가까운 미래를 배경으로 거짓말을 일삼는 국가권력을 꼬집는다. 만듦새가 카뮈와 서태지의 이름값에 미치지 못하지만 부조리한 지도층을 무대화한 시도는 나름 새롭다.

시대의 아우성에 관한 한 충무로가 적극적이다. 개봉 엿새 만에 관객 300만 명을 돌파한 ‘터널’이 그렇다. 와르르 무너진 터널에 갇힌 자동차 판매원을 구출하는 과정을 다룬다. 그것도 완공 한 달이 안 된 새 터널에서다. 영화는 위기에 대처하는 정부의 무능을 꼬집는다. 정확한 설계도 하나 없는 부실공사, 생명보다 눈앞 손실을 계산하는 기업, 민심 무마 브리핑만 반복하는 당국 등 난맥상이 빚어진다. 2년 전 세월호 정국도 떠오른다. 우리는 진정 이 정도밖에 안 되는가.

흥행이 우선인 상업영화에서 과장은 불가피하다. 그럼에도 ‘터널’은 불편했다. ‘국가=가해자’ ‘시민=피해자’라는 이분법이 거슬렸다. 국가·체제로 대변되는 기득권 때리기에 올라탄 느낌이 강했다. 일시적 분풀이는 스트레스 해소에 그칠 뿐이다. 되레 무력감만 증폭시킬 수 있다. 영화 막판 주인공 정수(하정우)가 외치는 “다 꺼져” 한마디가 헛헛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터널’에 대한 호불호는 둘째 문제다. 요즘 재난영화가 잇따르고 있다. 역대 최악의 무더위를 식혀주는 계절 특수도 있겠지만 그만큼 살림살이가 팍팍하다는 방증일 수 있다. 올 첫 1000만 관객을 넘어선 ‘부산행’에 이어 ‘부산행’의 모티브가 된 애니메이션 ‘서울역’도 오늘 개봉한다. 두 영화는 마치 좀비처럼 하루하루 연명하는 보통 사람들, 그들을 지켜주지 못하는 우리 사회를 꿰뚫어본다. 별다른 이유 없이 서로 물고 물리는 살풍경이, 그것을 방조하는 국가권력이 섬뜩하다.

대중문화는 시대의 온도계다. 지금 이곳의 불쾌지수를 보여준다. “이대론 못 살겠다”는 영화 속 아우성이 공연한 엄살은 아닐 터다. 지난 광복절에 박근혜 대통령이 말한 ‘대한민국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잘못된 풍조’는 더더욱 아닐 것이다. 그래도 낙담할 필요까진 없다. 20년 전 ‘시대유감’ 노랫말은 사전심의에 걸렸다. 서태지는 오기로 연주곡만 발표했다. 지금은 최소 그런 반(反)문화는 없다.

박정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