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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속으로] 북쪽엔 미국·유럽인, 남쪽엔 중동·아시아인…두 얼굴의 이태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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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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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간판이 즐비한 서울 용산구 이태원2동 경리단길 옆 골목. [사진 오종택 기자]

서울 용산구 이태원2동 경리단길. 녹사평대로 쪽 초입에는 테라스를 갖춘 펍(서양식 선술집)들이 줄지어 있다. 오르막길을 따라가면 양편에 케이크 등을 파는 디저트 카페와 그리스·벨기에 등 각국의 전통 음식을 파는 고급 레스토랑들을 만난다. 지난 7일 오후 창을 통해 본 상점 안에는 외국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대부분 백인계였다. 주변 골목에는 외국산 핸드백·신발·의류를 모아 파는 편집숍들이 자리 잡고 있다. 언덕 끝 쪽에는 정원을 갖춘 고급 주택 수십 채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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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메이카 음악가 밥 말리가 벽에 그려져 있는 이태원1동 도로. [사진 오종택 기자]

경리단길에서 1㎞쯤 남쪽에 있는 지하철 이태원역 3번 출구 인근의 우사단로 10길에는 또 다른 이색 풍경이 펼쳐진다. ‘이슬람교 서울중앙성원’으로 이어지는 이 길에서 히잡을 쓴 여성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상점 간판들은 아랍어로 도배돼 있다. 대개 할랄푸드(이슬람 율법에 따라 가공된 식품) 판매점, 휴대전화 관련 업소, 잡화점이다. 전봇대 밑에 붙은 쓰레기 무단 투기를 금지하는 경고글은 한국어와 아랍어가 병기돼 있다.

외국인 거주지역도 양극화

서울 용산구 이태원 일대(이태원1·2동과 보광동)는 한국에서 대표적인 외국인 밀집지역이다. 그 안에서도 국적·인종에 따라 주요 거주 지역이 갈린다. 최근에는 이 현상이 더욱 분명하게 나타난다. 용산구청에서 입수한 ‘국적별 등록 외국인 인구 현황’에 따르면 이태원2동에는 1323명(6월 30일 기준)이 살고 있다. 그중 59%인 781명이 미주·유럽·오세아니아에서 왔다. 보광동은 외국인 거주자 1129명 중 70.4%인 795명이 아시아·중동·아프리카에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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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리단길과 흔히 ‘장진우식당거리’라 불리는 회나무길이 있는 이태원2동은 ‘이북’(梨北·북쪽 이태원), 보광동의 이슬람교 서울중앙성원·도깨비시장 옆 주택가 지역을 ‘이남’(梨南·남쪽 이태원)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이태원을 둘로 나누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경계선이 있는 셈이다. 이북에는 주로 경제적으로 발달한 지역 출신이, 이남에는 그보다 경제력이 약한 지역 출신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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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일대로 외국인들이 몰려오기 시작한 것은 한국전쟁 직후 용산에 미군부대가 자리 잡으면서부터다. 이후 대사관저나 주재원 거주용 주택들이 들어서면서 ‘이북’은 고급 거주 지역이 됐다. 이태원2동에 사는 미국인 J(27·프리랜서 작가)는 “지난해 한국에 왔는데 미국인이 많이 산다는 정보를 듣고 집을 구해 정착했다”고 말했다. 이 지역의 부동산 중개인 한모씨는 “이 일대 원룸 월세가 대략 70만원 이상이다. 여기 사는 외국인은 그 비용을 부담할 수 있는 북미·유럽계가 대부분이다”고 말했다.
‘이남’에 중동 및 서남아시아계 외국인이 모여 살기 시작한 것은 1976년 이슬람교 서울중앙성원이 들어선 이후다. 그중 상당수는 ‘코리안 드림’을 찾아왔다. 2003년에 이 지역이 뉴타운으로 지정됐지만 10년이 넘도록 재개발사업이 진행되지 않아 노후 주택들이 그대로 남았다. 용산구청 관계자는 “개발 이익을 노리고 집을 산 주인들이 방치하다시피 한 곳이 많다. 그 덕에 아프리카나 서남아시아에서 온 이들이 싼 월세로 거주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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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로 저가 상품들을 파는 보광동의 상점가. [사진 오종택 기자]

보광동에 접한 도깨비시장 주변 골목에는 가파른 언덕길을 따라 다닥다닥 붙어 있는 노후 주택들이 있다. 창문이 깨져 있거나 대문이 심하게 녹슬어 있는 빈집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쓰레기가 문 앞에 널려 있는 한 집의 대문에는 ‘이곳은 경찰관이 특별순찰하는 구역입니다’라는 문구가 적힌 종이가 붙어 있었다. 인근 파출소의 경찰관은 “재개발사업이 지연돼 내팽개쳐진 집이 많다. 노숙자 등이 들어와 사는 것을 막기 위해 스티커를 붙였다”고 말했다. 인근 부동산 중개업소의 주인은 “이 일대에는 보증금 없이 월세 20만~30만원을 내고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는 외국인이 많다”고 했다.

이 같은 외국인 거주지 분화 현상에 대해 김찬호 성공회대 문화인류학과 교수는 “문화적으로 동질감을 느끼는 그룹이 한 지역에 모여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두 지역의 격차 심화와 ‘이남’ 지역의 슬럼화를 경계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김영욱 세종대 건축공학과 교수는 “공간적인 분리가 지속되면 갈등으로 번질 수 있다. 행정력이나 경찰력이 통제하기 어려운 우범지대가 나타날 수도 있다. 지역을 융합하려는 시도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한광야 서울시 해방촌 총괄계획가는 “도서관이나 문화센터 등 서로 다른 지역 출신들이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 있는 문화적 공간을 마련하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S BOX] 교통 요지 이태원, 청나라군·일본군·미군 잇따라 주둔

이태원(梨泰院)은 조선시대의 원(院·공영 숙박시설) 중 하나였다. 주변에 배나무가 많아 이(梨) 자가 이름에 포함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태원 문화를 연구해 온 송도영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는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원 이름이 자연스럽게 지명이 됐다”고 설명했다.

이태원 옆의 용산은 한양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였다. 이 때문에 개항 후 한국에 들어온 외국 군대가 잇따라 주둔했다. 1884년 임오군란을 제압하려고 온 청나라 군대는 지금의 용산고 자리에 머물렀다. 일본군은 1906년 용산에 군사기지를 건설했다. 한국전쟁 이후 미군은 일제가 사용하던 기지를 접수했다. 그 뒤 이태원에는 미군을 대상으로 한 상점과 유흥업소가 들어섰다. 외교관과 주재원으로 파견된 외국인들을 위한 고급 주택들도 생겨났다.

이태원 일대로 서남아시아·중동계 외국인이 유입되기 시작한 것은 1976년 이슬람중앙성원 건립 이후다. 정부는 중동 국가와의 관계 증진을 위해 무상으로 터를 내줬다. 86년 아시안게임과 88년 서울 올림픽 이후에는 일자리를 찾아서 온 무슬림계 노동자들이 주변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이후 우사단로 10길을 따라 할랄푸드 판매점, 생활용품점 등이 들어서면서 지금의 모습이 됐다. 송 교수는 “이태원은 세계 문화가 곧바로 들어오는 통로”라고 말했다.

글=서준석 기자 seo.junsuk@joongang.co.kr
사진=오종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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