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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정치’에서 ‘쉬운 정치’로 나아가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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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김환영
김환영 기자 중앙일보 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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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영
논설위원

미국 정치가 심상치 않다. 세계 자유민주주의의 발전을 이끌고 나아가야 할 선도국 미국의 대선 정국에서 ‘미치겠다’ ‘아무개 후보 때문에 정말 돌아버리겠다’는 말이 공공연히 미국 국민·유권자들의 입에서 나오고 있다. 인터넷을 살펴보면 ‘이번 선거 기간에 미치지 않고 제정신으로 남아 있는 5가지 비법’ 같은 제목의 글들이 올라오고 있다. 다음과 같이 권유하는 글들이다. ‘매체 읽기·보기를 당분간 끊고 소설을 읽어라’ ‘시간을 내 기도하라’.

‘정치가 제일 쉽다’고 자신할 수 있는 정치가가
‘콜럼버스의 달걀’ 같은 비전 제시해야 난국 돌파

신앙의 힘을 빌려야 이번 미 대선에서 정신 건강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미국 정치는 엉망일까. 어느 정도까지 대표성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극단적인 사례가 흔하게 발견된다. 예컨대 죽마고우인데 선거에 대해 갑론을박하다 의절(義?)하는 경우도 나오고 있다. 게시 글이 내 생각과 너무 달라 페이스북 친구 목록에서 삭제해 버리기도 한다.(사람들과 절대로 정치나 종교 이야기 하지 말라는 경고도 있지만 사실 정치와 종교에 대해 서로 의견을 교환할 수 없다면 진정한 오프라인 친구도 온라인 친구도 아니다.) 이런 일은 미국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벌어진다. 비정상적인 ‘미친 정치’는 세계 곳곳에서 뉴 노멀(new normal)이 됐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라는 영화도 있지만 사실 정치의 속성 중 하나는 적어도 특정 시기, 특히 세계적·국가적 대전환기에는 광인(狂人)이 정치를 주도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평상시에도 상당 부분 제정신, 맨 정신으로는 할 수 없는 게 정치다. 정치에 섣불리 몸을 담그면 패가망신할 수 있다.

정치인으로 성공해 권력의 정점인 대통령이 돼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 대통령들은 대통령이 되기 전이나 후에 평범하고 나름 행복한 일반인은 결코 경험할 수 없는 망명·암살·투옥·자살을 겪었다. 자식까지 갇히는 경우도 있다. 정치인이 되지 않았다면 아마도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불행이다. 사람은 뭐니 뭐니 해도 목숨이 제일 소중하다. 하지만 지도자가 되려면 죽음까지 불사해야 한다. 정치인이 아닌 참여적 시민(댓글 달고 투표하는)마저도 의절까지 각오해야 하는 게 정치의 세계다. 정치의 극단적인 형태는 전쟁이다. 정치가 미치면 전쟁 발발로 수많은 무고한 생명이 희생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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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김회룡]

‘미친 정치’는 정치의 속성 자체에 항상 잠재돼 있지만 정상적인 상태는 아니다. ‘미친 정치’를 정상적인 상태로 복원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미친 정치’의 반대말은 무엇일까. 사전적 의미의 반대말과 현실적 의미의 반대말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사랑의 반대말이 증오가 아니라 무관심일 수도 있는 것처럼 말이다. ‘미친 정치’의 반대는 ‘쉬운 정치’다. 다음과 같은 인식에서다.

정치 때문에 거의 미치는 이유는 좌절·분노·절망 때문이다. 좌절과 분노와 절망의 본질이자 핵심은 ‘어려움’이다. 우리는 대학에 진학하는 것도 어렵고, 졸업도 어렵고, 취업도 어렵고, 자영업자로 성공하는 것도 어렵고, 결혼도 어렵고, 애를 낳아 기르는 것도 어렵고, 집 마련도 어렵고, 노후자금 마련도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다. 이런 국민의 어려움을 풀어주는 게 ‘쉬운 정치’ ‘쉬움의 정치’다.

무엇이 쉬운가. 쉽다는 것을 대표적으로 표상하는 이미지는 어떤 게 있을까. ‘콜럼버스의 달걀’과 ‘물 위에 떠 있는 오리’가 떠오른다. ‘콜럼버스의 달걀’은 알고 보면, 개발·개척하고 나면, 실천하고 나면 쉬운 ‘돌파구’다. 오리는 잘못 알려진 것과 달리 결코 물 밑에서 부단히 첨벙대지 않는다. 타고난 부력 덕분에 오리에게 가라앉지 않는 것은 ‘땅 짚고 헤엄치기’다.

지도자는 쉬운 길을 제시한다. 세계사의 흐름을 바꿔 놓은 예수와 마르크스만 해도 쉬운 길을 제시했다.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의 영혼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오의 복음서 11:28~30) 『공산당 선언』(1848)에서 마르크스(1818~1883)는 이렇게 말했다. “지배계급들로 하여금 공산주의 혁명 앞에서 벌벌 떨게 하라! 프롤레타리아가 혁명에서 잃을 것이라고는 쇠사슬뿐이요 얻을 것은 세계 전체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예수는 믿음만 있으면 누구나 ‘쉽게’ 하늘나라 백성이 되는 길을 제시했다. 마르크스는 노동자들이 단결만 하면 세계 전체를 ‘쉽게’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물론 믿음이나 단결에는 희생이 따른다. 그래서 예수는 이렇게 말한 것이다. “그리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가의 복음서 14:27)

정치는 물 위에 떠있는 게 제일 쉬운 오리처럼 ‘정치가 제일 쉬웠어요’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해야 한다. 정치인은 또 ‘콜럼버스의 달걀’을 제시해야 한다. 수출입국, 호헌철폐 독재타도, 북방외교 같은 게 ‘콜럼버스의 달걀’이다. 일자리, 양극화, 노령화, 통일 같은 민족적 현안에도 ‘콜럼버스의 달걀’이 분명히 나타날 것이다. 다음 우리나라 대선에서 ‘콜럼버스의 달걀’을 제시하는 ‘물 위의 오리’ 같은 후보가 여당·야당에서 나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번 미국 대선과 마찬가지로 우리 유권자들은 ‘차라리 미치고 싶다’며 절망할 것이다. 대한민국에 대한 믿음으로 국민을 단결하게 만드는 지도자가 필요하다.

김환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