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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 또 고난의 행군이 다가오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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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호
이철호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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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호
논설실장

북한에 제2의 고난의 행군이 다가올 불길한 조짐이 어른거린다. 돌아보면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권력을 세습한 지난 4년10개월은 좋은 시절이었다. 2007년부터 마이너스 성장을 해온 북한 경제가 2011년 0.8%의 성장률을 기록한 뒤 4년 연속 1%가 넘는 성장을 이어온 것이다. 가장 큰 효자는 무연탄이었다. 중국에 t당 100달러에 수출해 해마다 10억 달러씩 벌었다. 매년 개성공단에서 챙긴 돈(1억 달러)의 10배다. 덕분에 북한 대외교역은 2010년 47억 달러에서 2014년 76억 달러로 두 배 가까이 늘어났다.

여기에다 북한은 러시아(2만 명), 중국 (1만9000명), 중동(1만 명) 등에 파견한 6만여 명의 해외근로자를 통해 매년 2억 달러를 긁어모았다. 장마당도 500개 이상으로 늘어났다. 북한에 돈이 돌면서 김정은은 사치까지 부렸다. 2013년 마식령스키장과 문수 물놀이장을 열었고, 평양 대동강변에 고층 아파트 단지인 ‘평해튼(평양+맨해튼)’도 세웠다. 핵과 미사일 역시 아낌없이 뻥뻥 쏘았다. 김정은이 그동안 쏜 미사일은 모두 32발인데 이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집권 18년 동안 발사한 16발의 두 배다. 북한 권력의 원천이 외화(外貨)이고, 인민의 생명줄이 장마당이라면 지난 4년은 황금기였다.

하지만 지난해부터 정반대의 쓰나미가 북한을 덮치고 있다. 우선 무연탄 가격이 t당 50달러로 반 토막 났다. 북한 수출입의 91%를 차지하는 중국이 경제성장 둔화에다 석탄 소비까지 감축시켰기 때문이다. 대기오염을 의식한 중국의 환경기준이 까다로워지면서 북한 무연탄은 설 자리를 잃었다. 이로 인해 지난해 북한의 대외교역은 62억 달러로 전년 대비 17.9% 줄어 6년 만에 처음 감소했다. 러시아 루블화 가치도 반 토막 나 해외근로자들의 돈줄마저 말라버렸다. 여기에다 개성공단 폐쇄와 유엔 제재까지 북한 경제를 짓누르고 있다.

북한 경제의 불길한 징조는 탈북자 급증으로 이어지고 있다. 통일부는 1~7월 탈북자가 815명으로 전년 동기보다 15.6% 늘었다고 했다. 김정은이 2011년부터 탈북자 단속을 강화하면서 한때 연간 2000명이던 탈북자가 지난해 1276명까지 줄었다가 다시 증가세로 돌아선 것이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흐름은 북한 해외주재관들의 무더기 탈북이다. 최근 3년간 46명이나 탈북했다. 특히 올해는 중국의 식당종업원, 해외근로자들의 집단 탈북이 유난히 많아졌다. 외화 자금줄이 말라붙으면서 외화벌이 압박이 훨씬 심해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통일부는 “최근에는 이미 탈북한 가족을 찾아오거나 더 나은 삶의 기회를 찾아 탈북하는 흐름이 대세가 됐다”고 설명했다. 과거에는 생계형 탈북이나 신변에 위협을 느낀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이제 김정은 정권 자체에 한계를 느껴 탈북한다는 것이다.

지금처럼 통치자금의 원천인 외화가 줄어들고 국제사회의 거센 제재와 압박은 김정은으로선 권력세습 이후 처음 경험해 보는 일이다. 북한 체제의 상층부가 흔들릴 수 있고 더 이상 체제 과시용 쇼를 하기도 버겁게 됐다. 솔직히 2010년의 5·24조치는 북한에 별로 아프지 않았다. 북한 경제가 플러스 성장 국면에 접어든 데다 중국이라는 비상탈출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해부터 마이너스 성장으로 곤두박질한 상황에서 개성공단 폐쇄와 유엔 제재는 북한에 뼈아플 수밖에 없다. 체제 불안은 경제가 가라앉을 때 가장 위험한 법이다.

북한 김정은은 핵·경제 병진을 내걸었다. 핵과 미사일은 성공할지 몰라도, 문제는 경제다. 경제가 흔들리면 핵과 미사일도 흔들리고, 북한은 변화와 선택의 기로에 몰릴 수밖에 없다. 북한은 ‘가는 길 험난해도 웃으며 가자’며 고난의 행군을 견뎌 냈다. 하지만 이번에는 과학올림피아드의 영재와 북한 장성까지 탈북 대열에 들어섰다. 엘리트들의 충성심이 약해지면서 북한을 등지는 분위기가 뚜렷하다. 이제 북한 핵·미사일과 사드 배치 논쟁에서 한 걸음 물러나 북한 경제의 큰 흐름을 되짚어봤으면 싶다. 카를 마르크스도 하부구조(경제)가 상부구조(정치)를 지배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이철호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