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아베 우경화 견제하는 ‘백제계 일왕’ … 퇴위까진 산 넘어 산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491호 7 면

아키히토 일왕(오른쪽)이 8일 ‘생전 퇴위’ 의향을 직접 밝힐 예정이다. 사진은 지난 1월 26일 도쿄 하네다 국제공항에서 아키히토 일왕과 장남 나루히토 왕세자가 함께 걸어가고 있는 모습. [AP=뉴시스]

아키히토(明仁·82) 일왕이 8일 ‘생전 퇴위’ 의향을 직접 밝힐 것이라고 일본 언론들이 최근 일제히 보도했다. 이에 따라 아키히토 일왕이 살아 있는 동안에 나루히토(德仁·56) 왕세자에게 양위하는 후속 절차가 뒤따를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다. 생전에 이양이 실현될 경우 1817년 고카쿠(光格) 일왕 이후 약 200년 만의 첫 사례가 된다.


즉위를 비롯해 왕과 왕실에 대한 제반 규정은 헌법이 아니라 황실전범에 담겨 있다. 현행 황실전범에는 양위에 관한 조문이 없으므로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전범 개정이 필수적이다. 전문가회의의 자문을 거쳐 개정안을 마련하기까지 1~2년 정도 걸린다고 한다.

아키히토 일왕의 즉위식은 1990년 11월 27일 이세 신궁에서 열렸다. [AP=뉴시스]

125대 아키히토 일왕은 고령이다. 2002년 전립샘암 수술, 2012년 심장 수술 등 여러 차례 건강 문제가 포착될 때마다 공무 부담을 줄여야 한다는 얘기가 나왔다. 이로 인해 2011년 차남인 후미히토(文仁) 왕자는 격무에 시달리는 왕도 정년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양위의 첫째 이유는 건강 문제이겠지만 황실전범의 논의 과정에서는 분명 일왕의 과거와 현재, 미래에 관한 쟁론이 전개될 것이다. 그 파장은 어쩌면 일본의 평화헌법 개헌 문제에 버금갈지도 모른다.


초등학생의 감수성으로 전쟁을 목도했던 아키히토 왕세자는 상징천황제하에서 왕으로서의 길로 나아갔다. 특히 주목할 부분은 가정교사를 맡았던 미국인 여류 작가 엘리자베스 바이닝과의 만남이다. 1946년부터 4년 동안 왕세자는 절대 평화주의를 신봉하는 퀘이커 교도에게서 영어와 함께 평화헌법의 소중함을 터득했다고 한다. ‘대중 천황’으로 가는 첫 이벤트는 53년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의 대관식을 전후로 추진된 구미 14국 순방의 형식을 빌려 마련됐다. 수행 기자단은 젊은 왕세자의 동정을 실황중계처럼 보도했고 일본 국민은 반년 넘게 봇물처럼 쏟아지는 기사에 매료되었다.


제2탄은 왕세자의 자유연애와 결혼이었다. 58년부터 이듬해까지 제분회사 오너의 딸 미치코(美智子)와의 교제와 결혼을 놓고 모든 매스컴은 치열한 취재 경쟁을 벌였다. 이른바 ‘밋치 붐’이다. 테니스장에서 데이트를 즐기는 ‘서민’ 미치코와 왕세자는 대중의 사랑을 받는 ‘스타’와 다를 바 없었다. 결혼식 후 거행된 퍼레이드를 보고자 연도에는 무려 53만 명이 운집했다.


89년 1월 대제국, 패전, 경제대국 등 롤러코스트 같던 히로히토 일왕의 치세가 막을 내렸다. 56세의 새 왕 아키히토는 “국민과 함께 일본국 헌법을 지키며 국운의 진전과 세계평화, 인류 복지의 증진을 간절히 희망한다”는 메시지를 낭독하며 등극했다. 그리고 27년 동안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헌법과 평화를 부르짖었다. 2013년 말의 기자회견에서는 “전후 연합군의 점령하에 있던 일본은 평화와 민주주의를 소중하게 여겼으며 일본국 헌법을 만들고 여러 개혁을 하여 지금의 일본을 쌓아왔다”고 말했고, 패전 70주년인 2015년 1월에는 “만주사변에서 시작된 이 전쟁의 역사를 충분히 배워 향후 일본의 모습을 전망하는 것이 지금 대단히 중요하다”고 언급했다. 역사 수정주의를 노골화하고 개헌을 성사시키려는 현 아베 정권하에서의 발언이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인터넷에서는 “일본에서 가장 현행 헌법을 존중하는 호헌파 중 한 사람”이라는 찬사가 넘쳐난다.


평화주의자 일왕은 한국에 대해서도 매우 우호적이다. 황국신민의 서사 암송을 강제했던 대일본제국의 히로히토 일왕은 84년 “양국 간에 불행한 과거가 있었던 것은 정말 유감”이라는 정도로 그쳤다. 하지만 아들 아키히토 일왕은 90년 “우리나라에 의해 초래된 불행한 시기에 귀국민이 겪었던 고통을 생각하며 저는 통석의 염을 금할 수 없다”는 말을 남겼다. 가해의 주체가 명시됐다. 통석은 유감보다 진전된 표현이다. 2001년 한·일 월드컵을 앞두고서는 “1300년 전 천황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었다”며 “한국과의 인연을 느끼고 있다”고 말해 우익의 분노를 샀다. 2005년의 사이판 방문 시에는 전격적으로 한국인 위령탑을 찾았다. 아베 총리의 우경화를 견제하는 ‘백제계 일왕’, 이것이 한국에서 공유되는 평가다.


아키히토 일왕은 방한 의사도 직?간접적으로 여러 차례 피력했다. 2012년 9월에는 “언젠가 우리가(일왕 부부) 한국을 방문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말했다는 여성주간지 보도도 있었다. 그러나 일왕의 방한 여부는 일본 정부의 결정 사항이어서 한·일 관계가 어떻게 되느냐에 달려 있다고 볼 수 있다.


아키히토 일왕 개인은 분명 평화주의자이며 ‘친한파’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러나 그것은 정치적 영향력과는 거리가 먼 ‘이미지’이고 ‘환상’일 따름이다. 현 일왕은 물론 그 후계자는 헌법이 개정되고 자위대가 국방군이 되어도(자민당의 개헌안) 공개적으로 반대 의사를 표시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할 수 없도록 명문화한 것이 평화헌법이다. 군국주의 시절조차 다르지 않았다. 유일한 주권자 히로히토 일왕은 진주만 급습을 기획한 도조 히데키 총리를 제지하지 않았다. 상징천황제하의 군주는 정치에 개입하지 않아야 한다. 그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이렇게 보면 ‘어의(禦意)’에 기대려는 정치는 예나 지금이나 민주주의의 빈곤과 맞닿아 있다. 그 점에서 앞으로 상징천황제와 민주주의의 관련성을 둘러싼 심도 있는 논의가 진행되길 기대한다.


얼마 안 있어 첫 상징천황은 살아서 옥좌에서 내려오고 나루히토 왕세자가 뒤를 이을 것이다. 새 일왕이 어떤 군주상을 보여줄지 궁금하지만 상징천황의 ‘정치성’을 획정하는 일본 내의 움직임은 우리가 꼭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다.


하종문 한신대 일본학과 교수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