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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마르코스 왕조붕괴와 코라손 시대의 개막|본사 특파원 국제전화 좌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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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진통을 거듭하던 필리핀 사태가 결국 「코라손」대통령을 탄생시켰다. 2·7대통령선거의 부정시비로부터 군부지도자들의 반란, 그리고 미국을 비롯한 우방국들의 국제적 압력의 산물이 된 필리핀 사태의 배경은 무엇이며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본사는 긴박한 필리핀사태를 긴급 진단해 보기 위해 본사 김건진 외신부장과 장두성 워싱턴특파원·최철주 동경특파원, 그리고 현지에 급파된 박병석 특파원간의 4각 국제전화좌담을 마련했다.
▲필리핀의 대세가 「코라손」 편으로 돌아서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아무래도 24일에 나온 미 백악관 성명인것 같습니다.
「레이건」 대통령의 사전승인을 받아 「스피크스」 백악관대변인이 낭독한 이 성명은 「마르코스」에 대한 미국의 지지를 철회하고 「코라손」 을 공개적으로 엄호함으로써 긴박감 돌던 필리핀정국의 판세에 종지부를 찍은 셈이 됐지요.
▲필리핀에 있는 수비크 해군기지와 클라크 공군기지등 두개의 중요한 기지를 수호하는 것을 필리핀 사태해결의 대전제로 삼고있던 미국은 필리핀 사태가 유혈대결로 악화하는 것을 가장 경계해 왔읍니다.
미국은 또 친미세력의 기반인 군부가 이번 사태를 통해 손상되는 것을 무엇보다 경계하는 눈치였읍니다.
▲미국측 입장은 미국이 그동안 우방 독재의 몰락과정에서 겪은 실책을 교훈으로 삼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월남의 「디엠」 정권으로부터 시작해서 니카라과의「소모사」정권, 이란의 「팔레비」 정권등의 몰락에서 미국은 결국 반미·친공세력이 들어서는 것을 체험했읍니다.
그러나 최근에 있은 아이티사태나 필리핀사태를 모델로 놓고 볼때 「레이건」 행정부는 한발 앞서서 우방독재와 민주세력간의 충돌이 반미나 친미로 양극화 하기전에 손을 써서 후계체제가 친미 세력 손에 남아 있도록 독재의 몰락을 앞당기는 방법을 취하고있어요.
이것이 필리핀 사태를 다루는 미국입장의 새로운 요소인 것 같습니다.
미국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강력히 지지해온 「마르코스」를 희생시키지 않을 수 없다는 결단에서 그런 정책이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백악관 성명 발표가 코라손 승리를 결정>
▲그러나 미국이 이번처럼 우방정치에 노골적으로 깊숙히 개입한 사례는 그 결과와는 관계없이 앞으로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필리핀은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나라입니다. 쿠데타의 일반원칙이 무시된 쿠데타가 일어난 것도 그렇고 「마르코스」측의 진압태도 또한 그렇지 않습니까. 대개는 최고통치자의 권력을 먼저 묶어두고 방송국등 주요 시설물을 점거한 다음에 거사사실을 밝히는 것이 우리가 알고있는 쿠데타의 진행과정인데 필리핀 경우는 거꾸로 되지 않았읍니까.
▲반군과 정부군의 대치상황이 계속되고 곳곳에서 총격전이 벌어졌는데도 인명피해가 거의 없었다는 사실도 주목할만한 일입니다. 필리핀에서는 민간인들의 총기소지가 자유화되어있고 지방선거를 한번 치르더라도 수 백명의 사상자가 나오는 것이 하나의 전통처럼 되어있는데 선거보다 더 흥분하기 쉬운 무력충돌 과정에서도 이처럼 피해자가 적었다는 것은 이례적이라고 할수 있읍니다.
▲그렇다면 결국 이번 사태는 전 과정을 종합해 볼때 교과서적인 쿠데타가 아니라 대화를 통한 쿠데타, 또는 신사적 쿠데타라고 불러야 하겠군요.
▲「마르코스」 대통령이 이처럼 쉽게, 치명적인 파국을 맞게된 것은 자신이 스스로 만든 부정선거의 올가미에 걸려들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입니다. 자신의 무덤을 스스로 판 셈이지요.
▲필리핀사태에서 보여 준 국민들의 민주주의 수호 열망은 굉장한 것이었읍니다. 선거 투·개표과정에서부터 국민들은 적극 참여, 자원봉사자들로 구성된 선거 감시인단 단원들은 희생자가 속출하면서도 끝까지 투표함을 지켰읍니다.

<극히 적은 인명피해 또 다른 면모를 보여>
「엔릴레」 국방상과 「라모스」 참모총장 서리가 반란을 주도한 후에도 국민들은 맨몸으로 정부군의 탱크를 막아 공격을 저지하는 정신을 보여 줬습니다.
▲「코라손」 여사등 야당측에서도 미국의 작전에 가세했다고 볼 수 있읍니다. 미 행정부가 개표결과에 대해 「마르코스」 지지쪽으로 기울자 『미국과 「마르코스」의 야합』이라고 비난하며 범 국민불복종운동을 펼치기까지 했지 않습니까.
▲결국은 미국행정부의 주도아래 의회가 협조하고 비 야당도 가세한 「마르코스』타도작전이 비 군부에 의해 성공된 셈이군요. 「마르코스』쪽은 미국의 첫 선거후 반응에 『그러면 그렇지』하고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다가 아닌 밤중에 홍두깨 격으로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히고 말았고….
▲「엔릴레」 국방상과 「라모스」참모총장 서리가 반 「마르코스」 거사계획을 언제, 어떻게 세웠느냐가 궁금한데요.
▲「마르코스」 의 부정선거결과와 당선확정선언 이후 우발적으로 이루어졌다고는 볼 수 없지요. 또 이같은 정치개혁을 위한 군사행동이 미국의 사전 승낙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볼 때 적어도 미국과 비 군부개혁 세력, 좀더 넓게는 여기에 「코라손」측과 「하이메·신」추기경의 가톨릭 등 몇몇 핵심인물들은 사전에 거사계획을 함께 논의했거나 사전에 통고를 받았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이런 면에서 선거전 「신」 추기경이 『이번 선거는 필리핀에 민주주의를 다시 가져다 줄 것』이라고 예견한 말이 이해가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점에서 본다면 「레이건」미대통령이 「하비브」 특사를 보낸 것도 2개의 강력한 정당간의 화합을 위해서가 아니라 미국의 작전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주지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공교롭게도 그가 마닐라공항을 떠난 직후 「엔릴레」 -「라모스」 의 공동 모반 기자회견이 터져 나오지 않았읍니까. 오비이락도 이 정도면 메거톤급 이지요.
▲필리핀 정국수습에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비브 떠나기전에 작전 확인했을지도>
「마르코스」가 일단 물러난 다음에는 「코라손」 여사가 국민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있는 이상 정부개편이라든가 군부숙청·국민의회 해산 또는 여당의원들의 대규모 전향등이 일사천리로 진행될 것입니다. 필리핀 국민들도 선거유세나 이번 사태에서 보여주었듯이 「코라손」 여사가 집권한 뒤에는 더 이상의 혼란을 일으키지 않고 민주화대열에 동참하리라고 봅니다.
▲일본의 신문·TV들은 지난 며칠동안 뉴스의 대부분을 필리핀사태로 채웠읍니다.
특히 각TV들은 앞을 다투어 매시간 임시뉴스를 편성, 마닐라시가지도를 가리키며 어느 거리에 반 「마르코스」파 군중이 얼마만큼 몰렸다는 정도까지 상세히 설명하고 있으며 라디오의 음악프로그램 진행자가 필리핀사태를 전달하면서 『엉망이군요』 라고 「야단」치는 등 마치 이 사태가 일본에서 일어난것 같은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핫 뉴스가 되고 있읍니다.
▲일본이 그같이 높은 관심을 보이는 이유는 아무래도 경제적 이해관계 때문일 겁니다. 일본은 경제면에서 미국과 1, 2등을 다툴 만큼 필리핀과 밀접한 관계를 가져왔으며 필리핀의 대규모 공사에는 항상 일본의 대기업들이 자금줄을 쥐어 왔읍니다.
필리핀정세가 악화되자 일본정부는 「야나기야」 외무차관을 책임자로 한 대 필리핀대책본부를 발족시키고 「마르코스」 정부붕괴 이후의 새 정부에 대해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를 분석중이며 「나까소네」수상은 고위관리를 마닐라에 파견해서 「하비브」 미대통령특사 및 「코라손」 진영과 접촉하도록 명령했지요.
▲이번 필리핀사태에서 미국의 태도가 가장 큰 변수로 작용한 셈인데 어떻게 보면 이것은 필리핀 국민의 모순이라고도 할 수 있읍니다. 민주화를 하자니 미국의 도움이 필요하고 미국의 영향력을 배제하자니 민주화가 안 되는 딜레머에 빠진 것이지요. 이런 미국의 개입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물론 필리핀 입장에서 보면 명백한 내정간섭이겠죠. 그런데 소련이 「마르코스」 당선을 유일하게 축하했고 이번 미국의 개입에 대해서도 강력히 반박했는데 명분은 제3세계적이지만 그 뒤에는 결국 소련도 자국의 이해를 추구하고 있었다는 점이 재미 있읍니다.
▲이 문제는 미국과 필리핀 양국간의 문제로 봐서는 이해가 안 될것 같습니다. 블록간의 관계에서 봐야죠.
필리핀에 정치적 혼란이 오고 결과적으로 필리핀이 소련의 영향권 안에 들어가게 된다면 미국뿐 아니라 한국을 비롯한 전 자유진영의 큰 손실이 아니겠읍니까. 싫든 좋든 현대사회는 약소국의 결정보다는 강대국간의 세력싸움에 제3세계의 정책결정권이 영향을 받게돼 있지요. 이것이 냉엄한 국제정치의 현실 아니겠읍니까.

<미개입 저항감 없어 내정간섭으로 안 봐>
▲국제법적인 측면에서도 최근의 조류가 국내문제라는 것, 즉 국가가 배타적으로 관할할 수 있는 권한인 국가재량권이 점차 좁혀지고 있는 추세입니다.
▲필리핀의 정치·문화적 풍토도 중요하지요.
필리핀 사람들은 미국의 필리핀정치에 대한 깊숙한 관심이나 간섭에 별로 저항감을 안 느끼는게 일반적인 성향입니다.
▲그것은 필리핀이 독립할 때 독립전쟁을 크게 겪지 않고 미국으로부터 독립해서 대미감정에 다른 나라에서 보는 식민지 국가가 제국주의 국가에 대해 갖는 불쾌감이 별로 없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이것은 필리핀이 왕조를 거치지 은 역사를 가졌다는 데도 이유가 있지요.
▲한때 필리핀에 미국의 51번째 주가 되려는 운동이 있었을 때도 크게 저항감이 없었던 것도 그런 것이지요.
▲미국의 일반적 태도, 특히 진보파에서는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태도를 내정간섭으로 보지 않습니다. 이들의 생각은 미국이 그 동안 「마르코스」 의 독재화를 지원해 온만큼 이제는 이를 상쇄시키기 위해 민주화의 흐름을 지원해줘야 한다는 것이죠.
필리핀에 대한 잘못된 미국의 역할을 올바른 방향으로 돌리는 것은 내정간섭이 아니라는 태도입니다. 물론 이것이 국제정치의 이념·도덕성에 대한 고민이 없는 것은 아니나 「상쇄」의 개념을 통해 이를 정당화시키고 있읍니다.
▲미국의 이번 태도를 저는 대세에 따른 것이라 봅니다. 대세가 이미 기울어진 만큼 미국의 이익을 의해 「이기는 쪽」 에 신속히 붙은 것으로 봅니다.
한국의 4·19, 5·16에서 본 것같이 확실한 정책을 갖고 접근했다기보다 유동적인 사태에서 미국의 이익이 되는 방향을 선택한 것 같습니다.
▲결국 국제정치는 도덕성보다는 힘이지요. 미국의 목적은 신인민군을 견제해 미국의 이익을 보호하자는 것이겠죠. 이렇게 약소국은 국내문제마저 강대국의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차가운 국제 정치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 강대국의 간섭을 배제하려면 스스로의 민주화 역량을 키울 수밖에 없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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