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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험난한 민주화의 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마르코스」정권의 붕괴는 필리핀 국민들이 20년 동안이나 갈구했던 민주화의 실현이자 정의편에선 민중의 승리였다.
이는 또 민주주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했던 필리핀의 야당지도자 고「베니그노·아키노」상원의원의 꿈이 이루어진 것이며 그의 뜻을 받들어 민주대열에 앞장선 부인「코라손」여사와 통합 야당의 쾌거이기도 하다.
장기독재에 종지부를 찍고 새롭게 출범한「코라손」정부는 필리핀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폭넓은 국민들의 지지를 밑바탕으로 하여 수립됐다는 점에서 밝은 앞날을 예견케 해준다.
「코라손」대통령은 지난해말 선거유세를 통해 정치 일선에 나서면서 자신의 정책비전을 제시한「집권 1백일의 구상」을 밝힌바 있다.
그러나「마르코스」가 남긴 20년 장기독재의 병폐 때문에「코라손」대통령의 앞날이 순탄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우선 부정부패의 온상이었던 행정부와 군부에 대수술을 단행해야 할 것이며 10여년간 앓아 누워있는 경제의 치유책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또「마르코스」의 독주로 그 동안 소원해진 미국과의 관계도 재정립할 것이 필요하고 정국안정의 암적 존재인 반정부 세력과도 화합을 모색하거나 아니면 공산화의 뿌리를 제거해야하는 양자택일의 기로에 놓여 있다. 그녀의 손길을 기다리는 문제들은 이밖에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이 산적되어 있다.
「코라손」대통령은 현재 필리핀이 안고 있는 모든 문제가「마르코스」의 장기 독재로 인한 정치적 부재에 기인한다고 보고 민주주의의 기본원리에 입각해 억압됐던 국민들의 의사를 존중, 민의에 따라 정치를 물어 나가겠다고 밝혔다.
이를 위한 첫 단계로 그녀는 족벌정치에 의한 과두지배체제를 해체하고 민주적인 신 헌법을 제정, 대통령에게 집중된 권력을 대폭 제한하거나 분산시키는 한편 장기집권의 병폐를 막기 위해 연임제를 없애고 6년 단임제를 실시하겠다고 이미 밝혔다. 그녀는 이와 함께 대통령 긴급조치권도 없애겠다고 했다.
「민주주의에 대한 사형선고」로 표현됐던「아키노」암살사건을 철저히 파헤쳐 규명하고 관련자를 처벌함으로써 필리핀 정치사에 남아있는 최악의 정치폭력을 국민과 정의 앞에서 심판 받게 할 것이라고 약속한바 있다. 「마르코스」와「베르」전군참모총장 등이 망명길에 올라 배후조종 혐의자들에 대한 처벌은 불가능해졌지만 적어도 미궁에 빠져있던 이 사건의 진상만은 밝혀질 것으로 기대된다.
한편 여러 파벌의 집합으로 되어있는 야당세력이 신정부 출범이후에도 계속 단합을 이룰 수가 있느냐가 의문이다.
야당은 크게「코라손」대통령의 라반당(LABAN NG BAYAN)과「라우렐」수상의 민주야당연합(UNIDO)으로 나뉜다.
UNIDO는 대통령후보 단일화 당시 조건으로 내세웠던 수상직에「라우렐」이 취임함으로써 벌써 분열의 조짐이 보이고 있다.
라반당도 10여개의 각기 다른 파가 모여서 선거전에 급조된 것으로 파벌간의 이해조정이 큰 변수로 남는다.
공산당의 경우도 중도좌파는 이번 선거에 참여한 반면 극좌파는 선거 보이코트의 태도를 일관해「코라손」정부도 인정하지 않겠다는 자세다.
이러한 공산당의 문제를 이상적인 대안만을 가지고 쉽게 해결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경제에서는 정부와「마르코스」친족들이 독점하고 있던 크로니캐피틀리즘(Crony Capitalism)을 해체, 국가자본을 일부 특권계층이 독점하는 것을 방지하고 민간기업을 활성화해 민관 협력 체제를 구성한다.
「마르코스」독재하에서의 필리핀 경제의 특징은 한마디로「마르코스」의 친척·친구들이 대기업을 장악하고 국가의 정책자금을 독점해온 것이었으며 이것이 연2년간에 걸친 마이너스 성장, 과다한 외채의 근원이 돼왔다.
필리핀의 외채는 85년말 현재 2백55억 달러에 달하고 있는데 이 가운데 4분의1 가량인 60억∼70억 달러가「마르코스」의 크로니(연줄)들에 의해 직·간접적으로 기채된 것으로 추정된다.
수출은 84년 53억 달러에 이어 지난해에는 이보다 줄어든 50억 달러 정도로 추정되고 있는데 이 가운데 3분의l이 외채의 원리금 상환에 충당되어야 할만큼 어려운 상황이다.
「코라손」대통령은 한편 농촌경제를 활성화시키고 영세농민들을 위한 방안으로 실질적인 농지개혁을 제시했다. 농민의 3분의2가 소작농으로「마르코스」정권도 농지개혁을 단행했었으나 결과는 대지주들에게만 이익이 돌아가고 소작농들은 굶주리다 못해 반정부 세력에 가담하는 병폐를 초래해 왔다.
대외관계에서는 미국과의 기지협상이 최우선 과제다. 협정만료 시한인 1991년까지는 현 상태로 존속을 보장한다. 그러나 어떠한 외국군 기지도 기본적으로는 반대한다는 입장이어서 미국과의 협상의 여지가 남아 있다.
「코라손」대통령 자신은 협정기간이 끝난 후 그때 가서 국제 정세의 변화를 감안하여 당사국과의 협의를 통해 해결하겠다는 방침을 밝힌바 있다.
그러나「코라손」시대의 성패는 군의 컨트롤에 있다고 보겠다. 이번「마르코스」추방의 주역이 군부였기 때문에 군부의 영향력이 더욱 커질 것이기 때문이다.
군개혁운동(RAM)의 리더인「라모스」참모총장 서리를 중심으로 군부부패의 원인이 돼온 대통령 충성파(「베르」파)를 숙청하고 직업 군인파로 하여금 군부를 이끌게 할 것이 예상된다.
군부는 지금까지「마르코스」충성파대 직업군인파가 7대3의 분포를 보였으나「코라손」대통령은 군 수뇌부를 장악해온「베르」휘하의 정년을 넘긴 장성들을 대대적으로 인사조치 하고 이 자리를 RAM의 젊은 장교들로 채움으로써 인사에 새바람을 불어넣겠다고 다짐한바 있다. <김상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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