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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종서<본사논설위원>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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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지금 세계의 정치적 특색의 하나는 권위주의 정부의 전반적인 후퇴 경향이다.
그것이 맨 먼저 온 곳은 유럽이다. 74년 포르투갈, 75년엔 스페인에서 서구의 마지막 권의주의가 붕괴되면서 민주화가 시작됐다.
80년대 들어 그 경향은 중남미를 휩쓸었다. 지금은 아시아로 옮겨와 필리핀이 한창 진통을 겪고있다.
묘하게도 이들 나라는 모두 라틴계의 가톨릭 국가들이다. 가톨릭의 엄격한 위계성과 신성성이 쉽게 정치적 권위주의의 소지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인권과 정의를 존중하는 종교적 본질 때문에 가톨릭이 이를 부정하는 권위주의와 영구공존할수는 없는것이다.
권위주의란 한마디로 말하면 현대형 독재정치다. 「뢰벤슈타인」(Karl Loewenstein)은『집권자 한사람이 정치권력을 독점하여 권력대상자(피지배자)를 정책 결정에서 배제하고 자기의 결정을 일방적으로 국민에게 부과하는 정치』 라고 정의했다.
권위주의는 유사민주주의의 외형에다 완화된 전체주의를 담은 정치형태다. 대체로 민주주의와 전체주의의 중간형이지만 전체주의에 더 가까운 체제다.
거기서는 법률이 꼭 국민의 의사나 이익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민주주의를「법의 지배」 (rule of law) 라고 하지만 권위주의는「지배자를 위한 법」(law for ruler)이라고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과거에는 권위주의 집권자는「나폴레옹」「페론」같은 카리스마적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런 영웅이 아니더라도 물리적 강제력을 갖는 조직을 장악하면 권위주의 통치는 가능하다. 지금의 권위주의는 대개 이런 부류다.
권위주의가 등장하는 사회는 혈연·지연등이 중시되는 전근대적 요소나 전체주의 전통이 뿌리 깊다. 대중은 빈곤하고 정치수준도 낮다. 민권을 추진할 중산층도 성립돼 있지 않다.
권의주의는 일반적으로 봉건사회가 근대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근대화를 내걸고 등장하는 과도적 현상이다. 산업화를 촉진하는 단계에서는 불가피한 정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로 그 같은 성격 때문에 권위주의는 실패하든 성공하든 변질될 수밖에 없는 숙명을 지닌다.
권위주의가 근대화에 실패하면 대중의 욕구불만에 부닥쳐 위기를 맞는다. 외채나 실업·저성장의 남미나 필리핀이 겪고있는 진통은 이에 속한다.
반대로 근대화에 성공하면 권위주의의 기반이 되는 전근대적 사회구조가 붕괴하기 때문에 그것은 설자리를 잃고 만다.
산업화가 이루어지면 생활수준과 교육수준이 높아지고 중산층이 형성된다. 이것은 국민의 정치적 성숙과 정치문화의 향상을 의미한다.
권위주의가 붕괴되는 형태를 이 분야의 학자들은 4개의 유형으로 분류하여 실명하고 있다.
첫째가 탈권(seizure) 이다. 폭력에 의한 집권체제내의 권력변동을 말한다. 체제에 참여하여 혜택받던 계층이나 파벌이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하는 경우다.
주동자는 결백하고 유능하여 존경받는 인격이라야 성공할 수 있다. 그런 인물이 집권하면 탄압이 더욱 심해져 전체주의로 후퇴하기 쉽다.
다음은 권력의 이양(transfer)이다. 체제내에서의 평화적 정권교체를 의미한다. 체제안에 있으면서 권력에 깊이 관여치 않은 사람이 폭력 동원 없이 집권하는 형태다. 변화는 점진적이고 온건하다. 스페인이 이에 해당한다.
세째는 권력의 투항(surrender)이다. 다른 체제간의 평화적 정권교체를 말한다. 반대세력으로부터 심한 위협을 받아 자의는 아니지만 순순히 정권을 내놓아 체제밖의 인물이 장악하는 형태다. 남미의 경우가 대개 여기에 속한다.
마지막은 권력의 전복(overthrow)이다. 체제간의 폭력에 의한 정권교체를 의미한다. 권위주의 집권자가 폭력을 가지고 최후까지 버티다가 힘에 의해 축출되는 경우다. 혁명이나 내란의 성격을 띤다. 변화는 파격하고 급진적이다. 이란이 이에 해당한다.
권력변동이 불가피할 경우 권위주의 집권층은 일반적으로 체제내의 사람만의 교체, 즉 이양을 희망한다.
개발목표를 추구하고 변화를 지향하는 발전지향적 권위주의는 대체로 도전을 덜 받는다.
그러나 권력유지만을 추구하고 보수를 지향하는 체제유지적 권위주의는 심각한 도전과 위기에 직면하게 마련이다.
정치체제가 정치문화의 수준에 맞을때 그 사회는 안정되고 정권은 장기화될수 있다. 국민수준이 향상되고 사회가 발전하면 정치체제도 발전돼야 한다는 것은 그 때문이다.
지금 필리핀이 겪고 있는 진통은 바로 그 같은 정치문화와 정치체제간의 불균형에서 온 정치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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