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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진극작가 설 무대가 없다|「대한민국 연극제」9년간의 작품분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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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70년대 이후 해마다 신춘문예 등을 통해 7∼8명씩 등장하고 있는 신진 극작가들의 활동 무대가 바늘구멍만한 데다 불과 10여명의 중진작가들이 무대 발표기회를 독점하고 있어 우리나라 연극계는 신인의 사장과 창작희곡의 부재라는 심각한 우려를 낳고 있다. 이런 현상은 77년에 시작돼 85년까지 9번 열린 대한민국연극제의 공연작품을 분석해 보면 금방 눈에 띈다.
9회 동안 막이 오른 작품수는 총 76편. 이 가운데 황석영·이문열·구상·이어령씨 등 비극작가들의 작품 l2편을 빼면 순수 극작가의 작품은 64편이다. 이중 단골 극작가는 이재현(7편)·윤조병(7편)·이강백(5편)·김상열(5편)·오태석(4편)·정복근(4편)씨 등.
이밖에 4편을 발표한 허규씨를 비롯해 3편을 발표한 차범석·이근삼·노경식씨 등의 작품까지 합하면 원로·중진작가의 작품이 무려 80%선까지 육박한다.
나이를 보면 3편을 발표해 겨우 이들의 대열에 낀 33세의 최인석씨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40대 후반에서 60대 연령층이다. 이는 시단이나 작단이 30대를 주축으로 이루어진 것과 비교한다면 엄청난 차이다. 결국 신춘문예 등을 통해 등단한 신진작가는 데뷔작이 곧 은퇴작이 된 셈이다.
현재 극작가로 데뷔한 인원은 한국극작가협회에 가입한 60여명을 포함해 전국적으로 1백50명 이상이다.
한국극작가협회 회장 오학영씨는『이미 극작가의 사장빈곤현상은 그 한계를 넘어섰다』 며『문단이나 연극계 양편모두가 이를 인식하면서도 현실에 급급해 이 문제를 외면하고 있다』고 밝혔다.
82년 서울신문, 84년 한국일보신춘문예 당선을 비롯해 83년 월간문학신인상, 83년 도의문화저작상(장막극) 등 모두 6번의 데뷔과정을 거치고도 작품발표의 기회가 막혀있는 성준기씨 (39)는『예술가에게 발표의 양이 마련되지 못하는 현실은 앞으로 개인뿐만 아니라 국가적으로도 큰 손실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현상은 창작극의 빈곤으로 직결된다. 이 빈곤현상은 과거 3년간의 우리나라 무대공연 실적을 분석해보면 더욱 잘 드러난다.
85년에 발표된 총 83편(통계 자료는 연극협회 산하 극단 공연편수에 의거) 중 창작극은 겨우 29편, 전체 공연편수의 35%수준에 머물러 84년의 총 87편중 35편(40%), 83년의 총 89편중 40편(45%)에 비교하면 엄청난 후퇴다.
지난해 공연된 창작극 29편중에서도 제작 지원금을 받는 대한민국연극제 참가작 8편과 국립극단이 공연한 3편 등 11편을 제외한다면 민간극단이 순수하게 자체 제작, 무대에 올린 창작극은 l8편에 머무르고 있다.
그것조차 극단 가교의『아벨만 재판』, 극단 성좌의『봄날』등 5편은 이미 수년전에 발표됐던 작품이며 극단연우무대의『한씨연대기』, 극단실험의『오, 나의 얼굴』등은 황석영씨와 이어령씨의 산문을 무대화한 것이고『바람부는 날에도 꽃은 피네』는 3년전 극단 자유극장이 극작가 없이 공동 제작한 작품이다.
결국 한햇동안 민간차원의 신작극은 10편 수준이라는 결론이다. 이것은 문화위기라고까지 할 수 있다.
이같은 실정은 86년 들어 더욱 악화될 조짐을 보여 올l∼2월 공연작품중 신작창작극은 전무한 상태다. 극단민중의『티 타임의 정사』, 극단성좌의『느릅나무그늘의 욕망』, 극단 대중의『병사와 수녀』등 앞으로 공연될 작품 역시 수차례 공연으로 익히 알려진 번역극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뿐만아니라 올해부터는 종래 신작창작극으로 국한됐던 대한민국연극제 참가작품까지 기존의 작품을 허용함으로써 창작희곡의 빈곤현상은 점점 더 심해질 전망이다.
우리 연극계에 이처럼 창작극이 도외시되고 번역극, 그것도 재공연만 무성한데 대해 극단관계자들은 작품 한편을 올릴 때마다 극단의 사활을 걸어야할 정도로 재정이 안정되지 않은 영세성을 일차적 원인으로 꼽았다. 즉 연극계 발전 및 내일을 고려한 계획이나 장기적인 안목 없이 그때그때 흥행성공만을 목적으로 작품을 선정하고 있다는 것.
또 극작가가 연극인으로 탈바꿈해 극단과의 공동작업에 나서지 못하는 현상도 주요원인으로 꼽힌다. 단지 문학인으로서의 극작가에 대해 극단은 별로 달가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극단 민중의 연출가 정진수씨는『신선한 시각을 가진 새로운 극작가의 육성이야말로 앞으로 우리 연극이 살길』이라며『신인무대 또는 실험무대 등 이들을 위한 제도적인 장치가 정책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극작가 이현화씨의 작품『0.917』『카덴자』 등으로 78년부터 큰 성공을 거두고 있는 극단 쎄실대표 채윤일씨도『우리 실정에 맞지 않는 번역극에 앞으로 무슨 관객이 그리 모이겠느냐』며『과감한 창작극공연만이 극단의 살길』 이라고 적극적인 주장을 폈다.
평론가 양혜숙씨는『신인들의 작품이 무대와 다소 거리가 있다하더라도 작품을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연출가들이 조정해 나가면 가능한 일』이라며『소세이나 산문을 각색해 무대에 올리면서 신인들의 작품을 기피한다면 앞으로 누가 희곡을 써 무대에서 우리 이야기를 말하려하겠는가』고 반문했다.

<양헌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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