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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냉면 애정인들에게 告함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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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9호 34면

평양냉면


한국 민족문화대백과 사전 메밀가루로 만든 국수를 찬 국물에 말아먹는 평양 지방의 향토 음식. 꿩을 삶은 육수와 동치미 국물을 섞어 국물을 만든다. 『동국세시기』에서는 냉면을 겨울철 시식으로 꼽았고 서북지방에서는 영하 20도 정도 강추위에 뜨거운 온돌방에 앉아 이가 시린 찬 냉면을 먹는 ‘이냉치냉’의 묘미를 즐겼다. 한국전쟁 이후 월남민에 의하여 전국에 퍼지게 되어 사계절 즐겨 먹는 음식이 되었다.


그 여자의 사전 그 여자가 처음으로 사랑에 빠졌던 음식. 젊었던 시절 그 여자만의 독특한 음식 취향을 말해주는 대표주자였으나 지금은 너나 할 것 없이 즐기게 되어 여자를 이유없이 맥빠지게 하는 것. 한때는 그것을 먹느냐의 여부, 어떤 방법으로 먹느냐 그리고 어느 유파를 좋아하느냐로 사람을 가렸으나, 지금 그런 이야기를 했다가는 쓸데없는 불평쟁이로 비난받을까 입을 꾹 다물게 만든 애증의 음식.


오늘도 어김없이 페이스북에는 냉면집 앞으로 50미터 이상 길게 늘어선 사람들 사진이 올라왔어. 이런 걸 바라보는 당신의 심정, 잘 알아. 차마 말할 순 없지만 속으론 “당신들이 언제부터 이걸 즐겼다고 이러는 거야”“이러니 여름엔 당최 냉면을 먹을 수가 없잖아”투덜대고 있다는 것.


여기서 ‘언제부터?’라는 말에 강조점을 찍어야 할 필요가 있지. 그래, 우리 적어도 평양냉면에 입문한 지 최소 10년은 되어야 진정한 애정인이라고 인정하고 싶은 거 아냐? 20여년 전 그것을 처음 맛보았을 때를 잊을 수가 없어. 꾸미지 않은 듯 무심한 자태에 슴슴한 육수 맛. 겨우 20대 초반이었지만 난 깨달았지. 아, 이것이 내가 평생 찾던 맛이구나.


그리고 그 첫사랑 때문에 앳된 처녀 시절부터 백발이 성성한 어른들이 낮술로 불콰한 얼굴로 냉면을 드시던 그 와중에도 혼자 꿋꿋이 틈만 나면 그곳을 찾아가서 냉면을 먹고 왔더랬어. 지금은 강남 일대에도 큰 규모의 분점을 차린 유명 냉면집이 처음 문을 열었을 때, 아무도 없던 그곳에서 역시 혼자 앉아서 “사장님, 그러니까 면이 아주 정말 조금 덜 삶아 진 것 같아요”라고 말하면 진지한 사장님은 “잠깐만요. (맛을 본 뒤) 아, 딱 10초 덜 삶아졌군요. 다시 드리겠습니다”하시던, 이런 ‘덕후’같은 대화를 주고 받았던 기억도 있고.


물론 맛있다고 다른 사람들을 데리고 가면 열에 서넛은 ‘왜 이렇게 맛도 없는 불어터진 것 같은 냉면을 먹느냐’는 표정으로 뜨악해 했던 시기도 다 견뎌냈어. 그러니 우리가 평양냉면이 오늘날 이렇게 인기 품목으로 자리 잡은 데 오랜 시간 공헌한 걸 아무도 몰라준다 해도 우리끼리는 서로 격려해 줘야해.


그 시절 우리는 남과는 구별되는 음식 취향을 가졌다는 자부심으로 버텨왔어. 그건 처음 이 취향의 선 안으로 들어오려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분식점 냉면만 알고 있는 네게는 좀 힘들 수도 있겠다” “가위로 끊어먹지 마라” “함부로 식초부터 치면 안 된다”라는 잔소리와 ‘의정부파’니 ‘장충동파’니 족보를 읊을 수 있는 권리라고 여겼고, 그건 ‘너희들은 잘 모르겠지만 난 이만큼 앞서 있어“라는 우쭐거림과 같은 말이었지.


그러나 몇 년 전 존박이라는 기특한 미국 출신 청년이 냉면 사랑을 공표하면서부터 조짐이 이상했지. 온갖 미식 프로그램에 냉면이 등장해 매일 냉면집마다 장사진을 이루는 오늘의 상황은 마치 국카스텐이 ‘나는 가수다’에 나올 때까지만 해도 참을 수 있었는데 ‘복면가왕’의 음악대장이 되어버린 것 같은 거야. 나만의 취향이 유행이 되고 보편이 되어버린 지금 우리의 자부심은 이제 심지어 다른 사람들의 불편함이 되어버렸다며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해. ‘맨스플레인’이라는 말에 빗대 그걸 ’면스플레인’이라고 한다나? 우린 억울해. 먹고 싶을 때 쉽게 먹지 못하는 우리도 불편하긴 마찬가지인데 말이지.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변해버린 시대를 더 이상 고집스런 ‘냉부심’으로 버티면 우리만 시대에 뒤처진 사람이 되는 거야. 우리 이제, 평양냉면을 앞에 두고 이런저런 잔소리로 목청을 돋우지 말자고. 그냥 얼른 여름이 지나고 긴 줄이 사라지는 날 겨울 강추위를 뚫고 냉면집으로 달려가 이가 시릴 듯한 육수를 마시는 소박한 기쁨이라도 조용히 기다려 보자고. ●


이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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