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자 요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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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백색미의 분야에 있어서 우리 한국인은 세계인의 기수 되기에 충분한 관록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최순우의 『백자의 아름다움』이란 글의 한 대목이다.
한국인이 왜 그다지도 백색을 숭상하고 즐겼는지 남들은 좀처럼 한국사람의 성정을 이해하기가 힘들 것이라는 말도 있다.
한국인의 백색 호상 정신을 가장 갈 나타낸 것이 조선백자다.
그것은 한국 미술의 정수의 하나도 된다.
성현의 『용재총화』에는 그 『조선백자는 세종대왕 무렵에 특히 세련되어 전무후무한 명품들이 광주 관요에서 만들어졌고 궁중에서는 백자를 전용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조선 전기인 16세기 조선 백자의 실상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요지가 최근 이대 박물관 팀에 의해 발굴됐다. 상번천리 5호 요지.
현재 광주 일대에 남아 있는 2백여개소의 백자 가마터 가운데 1965년 국립중앙박물관조사단이 발굴한 도마리 요지 이후 첫 발굴이다.
특히 백자요와 작업장, 풍부한 도편 퇴적층이 발굴됨으로써 최초의 조선백자 도요지의 완전 발굴이란 것이 의의 깊다.
출토 유물 중엔 가는 모래받침의 백자 대접·사발류와 비짐 돌 받침으로 구운 사발 접시류, 그리고 16세기 청화백자 접시편, 철회 백자제기와 백자 지석 등이 있어서 조선 전기 백자의 편년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그게 고려가마와의 관계를 연구하는데 기여할 것은 물론이다.
관요는 고려시대부터 있었던 관청이었다. 궁중의 제사나 연회를 담당하는 사선서가 그 시초다. 뒤에 사옹방이 되고 다시 사옹원이 되었다.
조선에선 특히 유교적 통치이념에 따라 의식이 중시돼 제사용 제기도 사옹원이 감독해 만들었다.
초기엔 지방 여러 곳에서 만들다가 곧 광주분원 한군데에서만 만들어 썼다. 분원에서 일한 사기장은 3백 80명이었다.
『적대전』에 의하면 사옹원에서 구워진 자기는 연 2회 춘추에 진상했다.
광주분원의 가마는 땔나무 조달 관계로 10년을 주기로 이동했다.
고정된 장소에 가마가 설치된 것은 영조 28년(1752년) 「양근군 남종면」에 분원이 설치됐을 때다.
지금 광주군 남종면 분원리의 가마는 폐허가 되었으나 최장기 가마터의 유적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이번에 발굴된 상번천리 가마터는 4백 50년 전 조선 초 백자 가마의 완형이란 점에서 우리의 관심을 끈다.
우리 문화의 자랑스런 성지를 보호하는 대책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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