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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인터뷰] ‘노무현의 동업자’ 안희정 인생고백 5시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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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노무현의 동업자’ 안희정 민주당 국가전략연구소 부소장이 5시간에 걸친 ‘월간중앙’과의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인생 풀 스토리를 고백했다. 그는 집권당 사무총장론, 21세기 신주류론을 통해 자신과 자신이 속한 386 정치세력의 진로를 암시했다. 운동권 시절 안기부 조사를 받으며 느꼈던 참담한 부끄러움을 실토하기도 했고, 최근 자신을 조사한 검찰의 행태에 대해서는 ‘몰아가기식’ 구태 수사의 전형이라며 강한 불만과 이의를 제기하기도 했다.

"인간 안희정을 알고 싶다. 다섯 시간만 내달라”는 기자의 인터뷰 요청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다섯 시간 만나 사람을 어떻게 아나? 쌀가마니에서 한 줌 쌀을 뽑아 검사해 보는 정도겠지.” 그는 고작 5시간의 인터뷰를 통해 한 인간의 전모를 드러내보고 싶다는 기자의 의욕을 ‘과욕’으로 단정했다. 그의 단정은 일면 맞고, 일면 틀리다. ‘사람은 겪어봐야 알지, 말만으로 알 수 없다’는 상식 차원에서 그의 말은 일리가 있지만, 인간의 흉중을 대변하는 유력한 수단은 역시 ‘말’일 수밖에 없다는 명제 역시 부정할 수 없다. 다만 5시간 안에 한 인간의 생각과 삶의 모습을 온전히 끌어내는 일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이기는 하다. 주고받는 말의 솔직함과 진정성이 전제돼야 하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그는 지난 7월10일 오후 2시부터 7시까지 5시간에 걸친 인터뷰에 응했다. 그는 자신의 인생에 대한 이런 저런 얘기를 들려줬다. 그 인생에 ‘역정’이라는 말을 붙이기에는 낯간지러울 만큼 그는 아직 젊다.(올해 만 40세) 그러나 어쨌든 조부모와 부모님의 삶 등 가계의 뿌리에서부터 자신의 성장기, 학창시절, 운동권시절 그리고 노무현 캠프에 합류해 집권 세력의 일원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그는 소상히 설명했다.

그는 매우 달변이다. 논리적이면서도 입담이 좋다. 거칠어 보이면서도 자세히 들어보면 논리가 견고하고, 비유법을 많이 사용하는데 그 비유가 적확하다. 교묘한 말솜씨는 아니지만 열정이 있다. 그 말솜씨로 수많은 사람과 논쟁하고 설득하고 때로는 공격하고 자신을 방어했을 것이다.

안희정은 386이라는, 과거 한국사회의 매우 전투적이고도 변혁지향적인 세대집단의 대표적 일원으로, 집권자를 둘러싼 가장 작은 동심원 안에 포함돼 있는 인사다. 그는 오랜 기간 집권자 노무현 대통령을 실무적으로 보좌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통치 철학의 일부를 형성하는 데 상당한 기여를 한 ‘이념적 측근’이기도 하다. 집권자를 둘러싼 넓은 동심원에는 물론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포함돼 있다. 능력을 인정받은 테크노크라트와 관료, 지난 선거 때 그를 도운 민주당내 기성 정치 세력, 시민단체 출신의 열성 지지자들, 질풍노도의 시대였던 1980년대에 대학생활을 보낸 30~40대 중산층이 그들이다. 아주 넓게는 그 무언가의 변화를 열망하며 그를 지지했던 그리고 한나라당과 이회창의 집권에 반대했던 과반수에 가까운 국민들이 그 동심원 안에 있다.

그런데 그 동심원 안에서의 안희정의 위치는 독특하다. 그는 집권자의 최측근이면서도 그와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거나 적어도 그렇게 보이는 어정쩡한 위치에 있다. 최근의 그의 궤적은 뫼비우스의 띠 위에 그려진 선처럼 ‘안과 밖’ ‘중심과 외곽’을 넘나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민주당 국가전략연구소 부소장이라는 한직을 맡고 있을 뿐, 드러나는 활동을 삼가는 것은 지금 그가 검찰에 의해 기소된 ‘피의자’의 신분 때문인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의 물밑 활동은 분주하고 그 영역은 넓다. 요즘도 그는 각계각층의 무수히 많은 인사들을 만나고 있다는 정황이 포착되고 있다.

지금 안희정을 주목하는 이유

이 시점 그를 주목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그 중 하나는 개인적 차원의 문제로, 그가 운영했던 생수회사에 들어갔다는 나라종금 자금의 위법성 여부다. 자신의 정치생명과 직결되는 사안인 동시에 그가 대표하는 노무현 정권내 386 참모들의 도덕적 정체성에도 영향을 미칠 사안임에 틀림 없다. 그가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지가 주목거리다.

둘째, 안희정이라는 존재는 민주당 신당의 밑그림, 특히 인적 자원 충원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는 지금 신당의 이념과 정치개혁의 청사진을 담은 저서를 준비중이고, 이 책은 내년 총선에서 노무현 신당의 전략교과서로 읽힐 전망이다. 인터뷰에서도 밝혔지만 그는 능력과 청렴성을 검증받은 변혁운동 세대의 주류 정치권 진입을 시대적 요구로 믿고 있다. 그의 향후 역할은 그 거대한 인적자원을 네트워킹하는 일이다. 그는 이번 인터뷰에서 스스로 사무총장을 맡아 신당의 산파 역할을 맡고 싶다는 정치적 희망을 피력했다. 그 작업의 일환으로 최근 한나라당을 탈당한 의원들과도 일정한 교감과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음을 굳이 부인하지 않았다.

그는 30여 년 전 ‘40대 기수론’을 외쳤던 양김(兩金)에게 보냈던 대중의 경의와 지지를 기억하고 있다. 38세에 공화당 의장을 지냈던 김종필(JP)의 ‘정치적 조숙함’을 기억한다. 그는 자신이 속한 세대가 충분한 자격을 갖추고 있으며 역사의 무대에서 전면적인 주역의 교체 시기가 임박했다고 믿는다.

그와의 인터뷰는 민주당 국가전략연구소 부소장실에서 진행됐다.

― 고려대 재학 시절 지하 운동권의 핵심으로 활약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83학번 운동권은 학생운동 사상 처음으로 매우 이데올로기적인 학생운동 체계를 구축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저는 고대 합격자 발표가 나기도 전에 고려대 운동권 서클에 가입했어요. 제일교회에서 야학 활동을 했던 한 선배를 통해서였습니다. 불합격하면 가짜 학생증이라도 만들어 다닐테니 몇 달 간만이라도 학생운동을 하게 해달라고 부탁했던 기억이 납니다. 지하서클이었어요. 1980년의 패배를 뼈저리게 느꼈던 학생들이 만든 서클이었습니다. 1980년의 탄압을 통해 공개된 조직은 무참히 다 깨져 버렸으니까요. 학생운동이 다 무너져도 복구의 기반이 될 수 있는 서클이 있어야겠다는 문제의식의 소산이 이 같은 지하 학생운동 조직을 만들었습니다. 일종의 종자(種子) 조직이었다고 할 수 있지요.

1학년 말이 될 때까지 81학번 선배 한 사람과 1대 1로만 접촉하며 활동했고 학생회나 단과대·학과 행사에는 일절 얼굴을 비치지 않았습니다. 1984년에는 대학 운동권에 매우 중대한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전두환 정권이 소위 학원자율화 정책을 추진하면서 학도호국단 대신 총학생회가 탄생했고 학회 활동이 활발해지기 시작하면서 공개된 운동 서클이 활발한 활동을 개시한 겁니다.

1979년 남민전 사건 등 각종 시국사건, 80년 광주항쟁 이후 초토화된 운동권에 새 살이 돋기 시작한 것이죠. 그 때 처음으로 체계적인 ‘의식화 프로그램’이 만들어졌습니다. 운동을 이데올로기의 관점에서 정리하고 인식했던 첫 세대가 바로 우리 83학번들이에요.”

“안기부 조사받으며 자살 기도”

― 지금 생각하면 그때 학생들의 과격한 혁명 이론이 객관적 현실과 부합했느냐는 의문이 생깁니다.

“시대적 환경이 대응을 결정합니다.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총에 맞아 죽는 상황이 전개되어 좀더 높은 수준의 정권 타도 이데올로기가 필요해졌습니다. 운동을 하다 죽을 수 있는 상황이 도래하면 운동의 논리는 칼날처럼 날카로워지고 깊고 무거워지는 것입니다. 당연한 일이지요. 1980년대의 운동이 좌파운동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것은 올바른 평가가 아닙니다. 일면적 평가죠. 그 상대편에는 1980년대의 폭압적인 군사정권이 존재했습니다. 정통성 없는 정권으로부터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상황을 감수하며 운동해야만 했던 사람들은 보다 승화된 이데올로기적 운동 논리 없이는 운동을 할 수 없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당시 사회주의적 이데올로기를 갖고 운동했다는 것을 지금에 와서 부끄러워 할 필요는 조금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 운동 논리가 정교해지면서 학생운동권 내에서도 심각한 사상투쟁이 벌어졌지요? 그때 저도 대학에 다녔습니다만 관념적인 논쟁에 몰두하던 학우들의 모습을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4학년 때인 1986년에는 대학가의 모든 운동은 지하 이념서클에 의해 조직되고 지도되었습니다. 총학생회장·학회장 등 공개활동을 했던 사람들 모두 특정 지하서클을 모집단으로 삼고 활동했던 것이죠. 지하서클마다 각기 사회 변혁의 논리를 하나씩 가지고 있었어요. 그게 바로 ‘사회구성체 이행에 관한 혁명론’이었죠. 레닌과 마오쩌둥(毛澤東)의 전략전술론과 모순론 등이 풍미했는데 각 서클들이 혁명론을 둘러싸고 심각한 대립과 갈등을 빚었습니다. 사상투쟁이라는 이름 하에 서클들이 서로 원수가 돼버린 겁니다. 나중에는 서클의 존립을 위해 차별화된 이론을 하나씩 가질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까지 치달았습니다. 학생운동 내부에서 이념과 노선을 둘러싸고 각목싸움까지 벌어졌습니다. 상대방을 ‘린치’하는 수준까지 간 거죠.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게 뭡니까. 토씨 하나의 차이 가지고 사상투쟁을 한다며 상대방을 물고뜯는데 자기들이 뭐 그리 대단한 사상가들입니까. 아무 것도 아닌 친구들이 사상을 얘기하고 다니니 참 한심한 거예요.

그 싸움을 그만 하자는 취지에서 고려대 내 14개 서클을 해체하고 단일한 지하 조직을 만든 것이 애국학생회입니다. 그리고 이 조직을 전국적 차원으로 확대한 것이 반미청년회입니다. 고려대는 애국학생회, 서울대는 구국학생연맹(구학련), 연세대는 반제학생동맹이었어요.”

― 1987년과 88년 애국학생회 사건, 반미청년회 사건으로 각각 구속된 적이 있지요?

“1988년 반미청년회 건으로 구속돼 남산 안기부에서 조사받으면서 제 인생의 궤적에 변화가 옵니다. 저는 처절하게 패배했어요. 남산에서 조사받다 난로를 끌어안고 자살을 시도했던 서준식 선배를 떠올리며 저도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혀를 아래 윗니 사이에 놓고 꽉 깨물었는데 앞니가 그냥 떠버리는 거예요. 제가 인생에서 ‘패배’로 자인한 일은 딱 두 번뿐입니다. 1984년 84학번 후배들을 운동권으로 견인하면서 후배들을 끊임없이 고민하게 만들었습니다. 후배들로부터 마음으로부터의 신뢰와 존경을 받지 못하는 상태가 1년이나 계속되었습니다. 그 전에는 제가 참 기고만장했는데 나중에 생각해 보면 84학번 후배들이 저의 인생의 스승이 되어준 측면이 있습니다. 그들은 비록 저를 논리적으로 설복하지 못했지만 나중에 몸으로, 정서적으로 그들이 옳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 그들과는 왜 화학적 결합에 실패한 겁니까.

“그들 앞에서 ‘나는 이렇게 살았어’ 하면서 잘난 체하고 오만하게 굴었던 것이 그들을 자극했던 것 같아요. 그들의 고민을 너무 쉽게 재단해 ‘야, 다 때려치우고 인생 조지더라도 한번 해보는 거야’라는 식으로 다그쳤던 것 같습니다. ‘의식화’라는 것은 별 것 아닙니다. 사회적으로 이런 삶을 한번 같이 살아 보자는 상호 합의 같은 거죠. 쉽게 말해 ‘묻지마 동반투자’를 권유하는 거예요. 묻지마 동반투자의 임무를 위임받은 자는 투자가 실패할 경우 책임져야 합니다. 후배들이 ‘묻지마’ 부분에 대해 저에게 흔쾌한 동의와 신뢰를 보내 주지 않았으니… 저의 좌절감은 상당했던 것이죠.”

“감옥에서 이불 뒤집어쓰고 울었다”

― 1988년 남산에서도 패배했다는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내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스멀스멀 기어나오는 부끄러움을 참담하게 느꼈습니다. 완벽한 패배였지요. 저는 한 달 내내 같은 질문에 시달렸습니다. ‘네 말대로 혁명에 성공했다고 치자, 그러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할 거냐’는 질문이 그것이죠. 아침부터 밤까지 시달렸어요. 저는 그때 좌절했습니다. 민중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봉사하겠다는 당위적 관념만 있었지, 그 구체적 과정에 대해서는 제 자신 어떠한 준비도 돼 있지 않았던 거예요. 너무 부끄러워 감옥생활 내내 자다가도 일어나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나 같은 놈이 남들 앞에서 지도부입네 하면서 큰소리치고, ‘혁명은 다 이런 거야’ 하면서 잘난 체했던 제가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조사 과정에서 저는 동지들의 이름을 실명으로 세사람이나 실토했습니다. 그 바람에 한동안 수배생활을 하며 고생했던 사람 중 하나가 지금 우리 당 마포갑지구당 김윤태 위원장이에요. 누구보다 철저히 보안책임을 져야 할 제가 그것을 못 지킨 겁니다.

조사가 끝나고 안기부 수사관들이 제게 술을 사준 적이 있어요. ‘이번에 들어가면 3년에서 5년은 살아야 하니 마지막으로 술이나 한 잔 먹으라’는 것이었죠. 서울 장충동쪽의 한 룸카페에서 술을 사주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이 간첩 전향 프로그램 중 하나였어요. 일행 서너 명과 술을 마셨죠. 여자 나오는 집에 가자고도 했는데 아무리 무너져내려도 그것만은 못 하겠더군요. 술자리 도중 화장실에 갈 기회가 있었는데 아무도 나를 따라오지 않았어요. 도망갈 수도 있었습니다. 도망갈까… 도망가 학교로 돌아가 안희정이가 안기부에서 탈출했다는 대자보를 붙일까, 그런데 그 일도 못 하겠습디다. 안기부 조사에 굴복한 주제에 학교로 돌아가 학생운동의 영웅처럼 행동한다는 것이 또한 얼마나 가증스러운 일입니까.

감옥생활을 하면서 결심했습니다. 앞으로는 능력이 달리고 준비가 안 된 자리는 절대로 탐하지 않겠다고 말이지요. 책임지지 못하는 이름, 책임지지 못하는 명예로 내가 더욱 고무받고, 책임질 수 없는 일을 계속 벌였을 때 주변 사람들에게 끼칠 해악을 생각하게 됐습니다. 그 이후 나는 운동권의 대부라는 자의식을 버리고 민주화운동에 백의종군하기로 한 것이죠.”

― 남산 사건이 정치권 진입의 간접적 동기가 된 셈이군요?

“그렇습니다. 1989년 1월 김덕룡 의원의 비서로 들어가면서 정치권 생활을 시작했지요. 그 때도 참 어려웠습니다. 1984년 상경한 부모님들도 편하게 모시지 못했지요. 어머니는 파출부로 나가셨고 아버님은 건물 경비로 일하셨습니다. 부모님들이 그렇게 사시니 의원회관 청소하는 아주머니들에게도 정말 함부로 대하지 못했습니다.

“全權 주지 않으면 일하지 않는다”

― 운동의 이념과 현실정치의 풍경 사이에는 상당한 괴리가 느껴졌을 것 같습니다.

“1992년 총선이 끝나고 정치권생활이 너무 힘들게 느껴지더군요. 박봉에다 그다지 큰 보람도 느끼지 못했지요. 변혁운동은 역사라는 대지를 잘 가꿔 옥토로 만드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정치판은 역사의 대지가 산성이 되든 말든 과실만 따먹으려고 하는 사람들로 득실거렸습니다. 이것은 아니다 싶어 1991년에는 경남 창원으로 내려가 막노동을 몇 달 하기도 했어요. 일종의 하방사업처럼 말이지요. 창원노동복지회관을 짓고 올라왔지요.

1993년 이광재 씨가 지방자치연구회를 만들면서 여러 차례 저를 찾아와 공을 들였어요. 이광재 씨는 주변에 사람을 모으는 데는 비상한 능력이 있습니다. 1994년 초부터 노무현 캠프에 합류했고 학교도 복학해 다녔습니다.”

―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처지는 매우 불우했지요?

“노대통령은 1992년 선거에서 떨어지고 참 형편이 어려웠습니다. 변호사 시절 모았던 얼마 안 되는 돈도 다 까먹은 상황이었어요. 이 연구소를 운영하기 위해 노대통령은 애를 많이 썼어요. 당시 그는 전당대회를 통해 선출된 부총재였는데 일일이 의원들을 찾아다니며 연구소의 회비 자동 납부를 권유했어요. 한 달에 5만원에서 10만원 정도의 운영비를 보조받기 위해 당내 의원들에게 고개를 숙였죠. 어디 밀실에 가서 뭉칫돈을 끌어오는 재주는 없었지만 ‘대장’으로서의 기본적인 책무는 누구보다 열심히 수행했습니다. 당시 연구소 운영비가 월 1,200만원 정도 들어갔는데 자동회비로 들어오는 돈이 700만~800만원 정도 됐죠. 지금 민주당의 김원기 고문, 돌아가신 제정구 의원, 원혜영 시장 같은 분들이 많이 도와줬습니다.”

누구를 밀어야 하나

― 노대통령은 언제부터 대권 도전을 생각했던 겁니까?

“우리는 대통령을 목표로 해서 정치활동을 해본 적이 없어요. 2000년 부산에서 출마할 때 유권자들에게 ‘큰 꿈을 꾸고 있습니다. 도와주십시오’라고 호소했던 것은 선거를 의식한 발언이었고….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할 뿐 대권을 위한 장기 프로그램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노무현 참모들은 노무현에게 정치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가치를 배웁니다. 목표나 결과보다 과정의 소중함을 배운 것이죠. 만일 노무현과 같이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정치판의 젊은 ‘양아치’로 전락했을 거예요.

3김 이후, 김대중 이후는 과연 누구냐라는 질문에 봉착했을 때 우리는 참 궁색해졌어요. 누구를 밀어 김대중 이후 시대를 열어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이 없었던 거죠. 유일하게 밀어줄 만한 정치인이 김근태 의원이었습니다. 우리 내부에서는 김근태 씨를 밀 수 있다는 논의가 일찍부터 있었습니다.”

― 본인의 출마보다 김근태 씨를 밀어 주겠다는 데 더 무게를 뒀던 겁니까.

“2001년초 노대통령이 그렇게 말했어요. ‘정치적 지향점이나 가치를 생각할 때 김근태 씨 외에는 밀어줄 사람이 없다. 그런데 이 사람의 대중적 지지도가 나 이상으로 뛰지 않으면 어떻게 하느냐. 또 그 상황에서 본인이 마음을 접지 않으면 어떻게 하느냐, 이런 고민을 했어요. 아주 심각하게….

1995년 국민회의 전당대회 때도 노대통령은 이부영을 당 대표로 몰아가 보자, 이부영의 총대를 메고 전당대회를 치러보자고 주장한 적이 있어요. 내부적으로 그렇게 말을 하고 다녔죠. 그때 한 주간지 기자가 기사를 썼는데 ‘민주연합 세력이 당권 도전을 노리는 상황도 있을 수 있다. 그런데 노무현 부총재는 자신의 부총재직 쿼터를 확보하기 위해 이부영 의원을 밀고 있다는 해석도 있다’고 썼어요. 그때 정말 분노했습니다. 찾아온 기자를 쳐다보지도 않았습니다. 부총재직에 연연해 누구를 민 것이 아니라 ‘과연 내가 잘 할 수 있을까’라는 자신감 부족 때문이었어요. 그래서 노대통령은 항상 누구를 밀까를 생각했습니다.”

―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뛰어들기 직전에도 결국 ‘누구를 밀어야 하는가’를 고민했습니까.

“노대통령은 경선에 임하기 전에 두 가지를 생각했습니다. 김근태 의원이 지지율도 올라가지 않고 마음도 비우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그리고 만일 이인제 씨가 승리한다면 그 사람의 선거운동을 어떻게 할 수 있나 이 두 가지였죠. 나는 그의 두번째 고민을 굉장히 의외로 받아들였어요. 그분은 이렇게 말했어요. ‘야, 너희들 어쩌자고 나더러 후보 경선에 나서라고 하는 거야? 내가 지면 이인제 선거운동을 어떻게 하라고…. 그 사람하고 나하고는 가는 길이 다른데 선거운동을 어떻게 같이 하나? 선거운동 안 해줄 후보와 경선을 같이한다는 것 자체도 모순된 것 아닌가’ 이런 고민을 6개월 했습니다. 그때 제가 배웠어요. 저는 아주 쉽게 생각했거든요. 경선에서 지면 ‘동교동계가 미는데 내가 별 수 있나’하고 체념하든지, 이인제 씨를 지지해 주고 나중에 총리를 한번 하든지 하고 말이죠. 노대통령이 이런 생각을 하는 나를 얼마나 ‘양아치’로 생각했을까요? ‘원래 정치라는 것이 그런 것 아닙니까’ 하고 어린 나이에 건방을 떨었지만 그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거예요. 시간이 지나면 그분 생각이 옳았다는 것을 종종 실감하게 돼요.“

― 그런 고민을 안고 시작했지만 경선에 임해서는 생각을 깨끗이 정리했던 것 아닙니까.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기자들이 무수히 물었어요. 경선에서 이인제 씨에게 지면 어떻게 할 것이냐고요. 그분은 이인제 선거운동을 돕겠다는 말은 끝내 못했어요. 그냥 ‘승복하겠다’고만 했지요. 말을 곧 계약서로 생각하니까… 함부로 말을 못하는 거예요.”

― 경선 전에 노후보의 승리를 점치는 사람은 별로 없었습니다. 노련한 정치부 기자도 노후보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습니다.

“아무도 믿지 않았지만 우리는 우리가 이긴다는 확신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하기는 우리는 승패를 염두에 두고 정치를 하지는 않았으니까요. 예컨대 지역구를 종로에서 부산으로 옮기는 것도 그렇죠. 그냥 가는 거예요. 그리고 최선을 다하는 거죠. 그러나 경선 자체는 전혀 무모한 도전이 아니었습니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봤지요.”

스킨십이 아니라 ‘화답’의 문제

― 지지율이 한창 떨어질 때 캠프 내의 분위기가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때 참모들은 어떤 조언을 하고, 어떤 대책들을 논의했나요?

“정말 힘들었습니다. 당시 노후보는 말을 무척 아꼈어요. 후보와 당 대표의 분리라는 원칙을 굳게 견지하고 당이 한화갑 대표를 중심으로 체제를 정비할 때까지 기다리겠다고만 하셨습니다. 그때 후보의 권위를 내세워 당을 개혁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지금과 상황이 흡사해요. 그런데 역사와 승부해온 사람은 범인(凡人)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봅니다. 이렇게 얘기하면 광신도라고 하겠지만…. 하기는 10년 측근이 광신도가 되면 좀 어떻습니까.(폭소) 생각해 보세요. 후보는 수백만 명의 지지자들과 교감하는 겁니다. 그건 보통 일이 아니지요. 제가 의원님들을 만나면 그럽니다. 제발 (대통령을) 존경하시라고요. ‘옛날 골목길에서 같이 놀던 동료로 생각하지 마시고 존경 좀 해주세요’ 이렇게 말합니다.

지지율이 떨어지면서 노후보도 고민이 많았지요. 국민의 지지를 한곳에 모으는 거대한 태양열 집열판을 당이 만들어 줘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노후보 역시 뾰족한 수단이 없었던 겁니다.”

― 정몽준 후보 옹립을 의식했던 ‘후단협’에 의원들이 몰리면서 위기의식이 고조됐지요. 당시 노후보는 무력해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저는 정몽준의 지지율이라고 하는 것은 본선에 가면 원래의 가격이 나올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당시에는 이런 고정 관념이 있었습니다. 즉, 정몽준의 지지율이 높아지는 이유는 정을 대안으로 생각하는 당내 세력 탓이니 관리에 신경써야 한다, 한화갑 대표를 자주 찾아가고 의원들을 만나야 한다고 말이지요. 그러나 그것은 스킨십의 문제는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화답’이 중요한 것이죠. 노대통령은 ‘동업자’라는 말을 자주 씁니다. 동업자는 자발적인 관계입니다. 위험부담과 채무를 떠안고 스스로 책임을 공유하는 관계가 동업자죠. 도와주면 나중에 이렇게 보답하겠다는 말을 노대통령은 하지 않습니다. 언젠가 저에게 ‘동업자’라는 말을 쓴 적이 있지만, 그건 제가 ‘힘센 놈’이라는 뜻이 아니고 대통령이 사람 관계를 그렇게 맺는다는 뜻이에요. 위험부담과 책임을 같이 떠안을 수만 있다면 4,000만명이 동업자가 될 수 있지요.

우리가 돈을 못 끌어 오자 당내의 비난 목소리도 커졌습니다. ‘전혀 돈을 끌어오지 못하니 아무래도 후보를 잘못 뽑은 것 같다’는 말이 광범위하게 유포되기 시작했습니다.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노후보 흔들기가 심각한 수준까지 갔던 것은 돈문제가 결정적이었습니다. 그러니 노후보가 무력하게 보였을 겁니다. 과거 대선 후보들처럼 밀실에서 사람을 만나 뭉칫돈을 끌어오는 일에는 전혀 소질이 없었으니까요.“

패배 직감보다 오기가 생겨

― 그런 위기 상황에 돌파구가 열린 것이 소위 노·정 후보단일화 논의였습니다. 그때 노캠프 안에서는 상당한 이견이 존재했다고 들었는데 그 문제를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8월15일 원래 우리 캠프에서는 ‘정몽준 후보와 재경선할 용의 있다’는 발표를 하려고 했어요. 나는 못마땅했습니다. 왜냐. 정몽준과 우리는 동등한 위치에 놓일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우리가 갖고 있는 가치를 계속 밀어붙여 정씨가 갖고 있는 인기의 거품을 걷어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한 축으로 인정하는 등가교환은 안 된다고 주장했지요.

지난해 10월 여론조사 방식에 의한 후보단일화마저 받아들이겠다고 결정했을 때는 분해서 잠이 안 오더라고요. 후보 방에 찾아가 ‘지지해준 모든 사람이 위임한 재산을 정몽준과의 한판 노름판에 베팅할 권한이 우리에게 과연 있는 겁니까’라는 말씀을 드렸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없는 것 같았어요. 노후보는 ‘그래도 크게 보면 단일화를 못 해 선거에 졌을 때 훨씬 더 큰 욕을 먹을 것’이라고 했어요. 단일화 안 하고 자신의 가치를 지키는 일보다 대의(大義)를 위해 기득권을 포기하는 선례를 남기는 것이 더 가치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 선거 전날 공조가 파기됐을 때 패배를 직감하지 않으셨나요?

”저는 정몽준 씨와의 후보단일화를 대선의 준결승전이라고 생각했지 단일팀을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단일화를 주장했던 많은 사람들은 그런 준결승전의 의미보다 양쪽 세력의 결합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합의문을 보니 지는 사람이 상대방의 선대위원장을 맡는 것으로 돼 있더라고요. 아주 못마땅했어요. 두 분이 후보단일화 원칙에 동의하고 러브샷을 하는데 그 뒤에서 보면서 마음이 굉장히 비통했습니다. 사람들은 축배를 드는데 나는 그날 밤 잠 한숨 못 잤습니다. 30년 수절하던 어머니가 처음 보는 이상한 남자와 결혼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단일화 여론조사에서 이겼다는 보고를 드릴 때 노후보는 한 호텔에서 쉬고 있었어요. 그때 제 일성이 ‘내가 졌으면 더 좋았을 텐데…. 내가 얼마나 열심히 정몽준 씨의 선거운동을 해줄 수 있는지를 보여줄 수 있었을 텐데…’ 그랬습니다.

대통령선거 전날 몸이 너무 아파 시내 한 호텔에서 링거를 맞고 있었습니다. 당 대변인실에서 누군가 전화를 해줘 알게 됐죠. 갈 테면 가라지. 오기가 생기더군요. 결연한 생각이 들었지 진다는 생각은 없었습니다. 10시가 넘어 당에 가 보니 의원들 20~30명이 노후보를 에워싸고 후보가 실수했으니 가서 사과하는 것이 좋겠다는 말을 계속 하고 있었습니다. 노후보는 한 시간 동안 아무 말 없이 가만히 듣고만 있다 결국 정몽준 씨 자택으로 가시더군요.”

― 장수천 사업을 할 때 왜 나라종금 돈을 받은 겁니까.

“나라종금 돈이 아니죠. 나라종금 사장은 김호준 씨인데 나는 그 사람 모릅니다. 저는 김호준 씨의 동생 효근 씨의 투자금을 받은 겁니다. 효근 씨는 대학 1년 선배로 제가 20년간 인간관계를 맺어온 분입니다. 그가 운영하는 청바지회사 (주)닉스는 지금도 아주 탄탄한 회사로 알려져 있습니다. 고려대 선배 중 재력 있는 사람의 리스트에 김효근 사장의 이름은 늘 올라 있었어요. 20년간 맺은 인간적 신뢰관계, 안희정이라는 인간적 상표를 보고 회사에 투자금을 내놓은 겁니다. 그도 나를 믿고 위험을 부담한 것이지 내 뒤의 노무현을 보고, 뭔가 대가를 바라고 준 돈이 아닙니다.”

― 그 돈을 받을 때의 정황이 좀 음습하지 않습니까. 전액을 현금으로, 그것도 호텔 지하 주차장에서 받은 이유는 뭡니까.

“제가 그분에게 돈을 현금으로 달라고 말한 적 없습니다. 나를 돕겠다는 사람이 돈을 현금으로 가져왔는데 그것을 뭐라고 합니까. 수표로 바꿔 오라고 합니까. 지하 주차장에서 받았던 기억도 없습니다. 호텔 커피숍에서 만나 영수증을 써 줬고 호텔 현관 주차장에 세워둔 차에 돈을 실은 겁니다. 검찰에서도 그대로 진술했습니다.”

― 노대통령이 왜 생수회사를 운영하게 됐는지, 그리고 그 회사를 안희정 씨가 인수하게 된 경위가 궁금합니다.

“1993년 노대통령은 전당대회를 통해 국민회의 부총재에 선출됐어요. 국민회의내 영남권 대표주자로서 책임과 권한을 위임받은 것이죠. 되지도 않는 영남 지역 지구당위원장직을 맡아 달라고 그는 여러 사람에게 부탁했습니다. 그러면 최소한의 지구당 운영비, 여직원 봉급이라도 지원해 줘야죠. 그러기 위해서는 노부총재 스스로 타협을 하고 몸을 더럽혀야 합니다. 돈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죠. 그런데 이 분은 그런 것 못 합니다. 마음의 고통이 컸죠. 그래서 지구당위원장들 빚보증을 많이 서 줬습니다. 그러던 중 구미시 지구당위원장을 하던 분이 친척이 하는 사업을 자신이 하게 되면 지구당 사업에도 큰 보탬이 될 거라고 해서 1995년 6·27 지방선거 전 6월10일께 보증을 서 줬어요.

노대통령이 생수 사업을 시작한 것은 1996년 가을쯤입니다. 그해 4월 총선에서 종로에서 낙선하고 안산에서 변호사 개업을 하고 있을 때였지요. ‘웬 생수 사업을 하시냐’고 했더니 지난번 보증서준 것이 말썽이 났는데 조금만 투자하면 그 회사를 인수해 사업을 할 수 있겠다고 해요. 그때 막 ‘먹는 물 관리법’이 통과돼 생수사업이 적법한 사업이 됐죠. 그 전까지는 불법이었어요. 법이 통과되면서 생수공장에는 위생 기준을 맞추기 위해 엄청난 공장 설비가 필요해졌습니다. 고향의 형님, 친지들의 보증에 힘입어 리스 시설 투자를 했습니다. 1997년 IMF 직전 준공과 허가를 받았습니다. 당시 규모가 큰 생수회사들은 중소 생수회사에 물을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방식으로 생산하게 했습니다. 그러면서 20~30억원에 달하는 보증금을 줬어요. 그런 계산을 하면서 당시 원화 9억원, 외화 9억원 등 총 18억원의 차입금을 조달한 겁니다. 그런데 바로 IMF를 맞았습니다. 그러니 OEM 생산이니, 보증금이니 하는 것이 다 날아간 거죠. 그해 대선 직전 노대통령이 민주당에 입당하면서 내가 투자한 돈을 채권으로 할 테니 당신들이 잘 해 봐라 하면서 친지들에게 회사를 맡긴 겁니다.”

“재판부 판결에 승복하겠다”

― 안희정 씨는 어떻게 생수회사에 엮이게 된 겁니까.

“1996년말 한번 찾아뵈었더니 당시 노변호사가 이럽디다. ‘희정아, 네 도장 좀 가져와라. 우리 식구 중 네가 가장 가난하니 내가 큰 선물을 준비했다. 이 회사 대박 터질 회사다. 10% 지분을 줄 테니 도장 가져와’ 이러는 거예요. 어쨌든 고마운 생각이 들었어요. 노변호사는 1997년 대선 때부터 정치를 재개했으니 생수 회사 운영을 할 수 없었지요. 1998년까지 친구들이 회사를 운영했는데 분란만 일어나고 사업이 부진했어요. 당시 노대통령에게는 골칫덩어리였지요.

그래서 내가 회사 운영을 자청했던 겁니다. 주식을 전부 내게 달라고 했어요. ‘회사가 일어나면 내 돈이 되는 것이고, 망하면 대장이 망하는 겁니다, 그랬지요. 그래서 생수 제조회사인 장수천에 판매회사인 오아시스를 만들었어요. 장수천은 엉망이었으니 판매회사를 통해 영업이익을 남기고 브랜드 가치를 높여 나중에 오아시스와 장수천을 패키지로 팔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지방자치연구소를 재단법인으로 만들려고 했어요. 지인들에게 도움을 요청할 때도 그렇게 설명했습니다. 40억~50억원 가치가 있는 회사로 키워 연구소를 반석 위에 올려놓고 정말 걱정 없이 정치를 해 보겠다고 말이지요. 돈 좀 벌었다는 친구, 선배를 찾아다닌 겁니다.

2000년 여름 홍수가 나면서 관정에 노천수가 흘러들었습니다. 치명타였죠. 허가를 받아 몇 군데 구멍을 뚫어 보았지만 물이 안 나오더군요. 망한 거죠. 만세를 불렀어요. 그래서 투자받은 돈 일부를 갚지 못했고, 그것 때문에 제가 기소돼 재판받게 돼 있는 것이죠. 그게 전부입니다.”

― 검찰 수사 과정에서 이상호 원장의 투자금도 불거졌습니다.

“사업을 하면서 투자금을 받았던 것도 사실이고 사업이 망해 그 투자금을 갚지 못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분들이 선의로 그 부분을 양해해 준 것도 사실입니다. 이런 일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죠. 저는 상식 차원에서 충분히 판단할 수 있다고 믿지만 더 정확하게는 저를 심판할 재판부에서 판결내리겠죠. 그 판단이 콩이라면 콩이라고 믿겠고, 팥이라면 팥이라고 믿겠습니다.”

― 검찰 수사에 대해서는 왜 불만을 터뜨렸습니까.

“검찰 입장에서는 대통령의 측근을 풀어줬다는 욕을 먹기 싫었을 테니 현미경을 갖다 대고 조사했겠지요. 그것이 그들의 책무이기도 하다는 것을 모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진실을 진실대로 밝히는 것이 또한 그들의 책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주장하는 진실과, 국민과 여론이 바라는 진실이 있으니 그 사이에서 검찰도 곤혹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범행을 밝혀내는 것만큼이나 한 사람의 인권을 지켜 주고 진실을 드러내는 일 역시 중요합니다. 서양음악의 역사에서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관중석을 향해 지휘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지금 검찰이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내 눈빛을 보고 지휘해 달라, 내 주변의 진실을 보고 지휘해 달라, 이렇게 말하고 싶어요.”

― 창신섬유 강금원 회장은 왜 만났습니까. 억울함을 호소하고 강회장으로 하여금 문재인 수석을 공격하도록 주문했다는 설이 보도되기도 했잖습니까.

“완전한 오보예요. 진상은 그 반대입니다. 강회장은 자기가 아는 한의 진상을 밝히면 이런저런 오해도 없어질 테니 해명하겠다고 했어요. 그래서 저는 ‘그런 측면도 분명히 있다, 그러나 이기명 씨 땅을 처음에 누가 사려고 했는지를 굳이 밝히지 않아도 된다. 괜히 꼬리에 꼬리를 무는 시빗거리와 왜곡보도의 근거를 주지 맙시다. 조용히 계시라’ 이렇게 설득했어요.”

― 그런데 강회장은 결국 기자회견을 했잖습니까.

“어느 신문에선가 최초 땅 구매의 계약자가 강회장이라는 보도가 나와 어쩔 수 없이 했을 겁니다. 그런 얘기가 어떻게 새나갔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요.”

“차라리 들어가는 것이 낫겠다”

― 강회장은 왜 문재인 수석을 공격한 겁니까.

“자기가 볼 때는 별 것 아닌 것 가지고 대통령께서 계속 시달리고 계시니 마음이 안타까워 잘 보필하라는 의미로 그랬던 것이죠.”

― 기자회견 내용을 보면 그런 뉘앙스는 아닌 것 같았어요. 혹시 안희정 씨가 검찰 수사를 받는 과정에서 문재인 수석에게 강한 불만과 분노를 느꼈던 것은 아닙니까.

“앞뒤가 뻔한 일을 한나라당과 언론의 눈치를 보면서 처리할 것이냐. 어차피 다 사람이 하는 일인데…. 검사들도 결국 사람인데 대통령의 측근을 봐준다는 의혹을 받기는 싫었겠지요. 구속하는 방향으로 가고 싶었을 겁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방향을 잡는 것 자체를 ‘구태’(舊態)로 보는 겁니다. 그렇게 판단하는 것은 검찰의 소관은 아닙니다.”

― 문수석도 검찰과 같은 생각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대통령을 위해 안희정 씨가 차라리 구속되는 편이 낫지 않겠나…. 대통령을 보좌하는 입장에서 그런 판단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거죠.

“하기는 저마저 그런 생각을 했을 정도니까…. 검찰청 창문에서 바라보니 기자들이 구름처럼 모여 있는데,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아이고… 그래 들어가자. 들어가는 게 낳겠다’ 라고요. 나도 그런 생각을 했으니까요. 너무 징그럽더라고요. 무혐의로 나오면 얼마나 또 들들 볶이겠어요? 그렇다고 내가 억울하다고 하면 누구 하나 내 편을 들어줄 겁니까. 언론이 귀를 기울여 주겠어요? 그것이 정치자금이고 뇌물이라면 법대 1학년 학생에게 향토장학금 주는 것도 뇌물이에요. 그 친구들 3~4년 지나면 고시 붙어 검사 되잖아요? 그러면 향토장학회 회장 아들이 어디 가서 불이익당하면 안 봐주겠어요? 그것이 훨씬 빠른 반대급부죠. 4년 전 노무현·안희정에게 누가 뇌물을 갖다줘요? 불과 1년 반 전 후보 경선을 앞두고도 한 푼 주는 사람이 없었는데요. 마감 날까지 공탁금 2억5,000만원을 못 구해 쩔쩔맸어요.

내 인생을 신뢰하는 사람이 준 돈이고, 내 사업에 투자받은 돈이에요. 사업하면서 누구든 돈을 끌어다 쓸 수 있는 것 아닙니까. 대통령 취임 이후 내가 단 한 푼이라도 돈을 받은 것이 있다면 그것을 밝혀 처벌해 달라는 겁니다.”

― 문수석에게 서운한 감정을 품었던 것은 사실이군요?

“아니, 내 스스로 들어가는 것이 낳지 않겠나 라고 생각할 정도였으니 다른 사람들은 어땠겠어요? 그러니 서운한 감정이니 뭐 그런 것은 의미가 없어져 버리는 것이죠. 중요한 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 노무현 정권에 참여한 386 세대의 능력과 도덕성에 상처가 생긴 것 아닙니까. 어떻게 이들이 앞으로 노무현 정권의 중심 세력으로 국가를 이끌 수 있겠느냐는 우려가 있습니다.

“현 정권에 참여한 386세대가 무한의 책임감을 느끼면서 아주 무거운 판단을 내리고 철저한 준비를 해야 할 시점이 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절대로 ‘미숙함’ 때문에 일이 안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한 가문의 퇴락은 후손들의 ‘미숙함’ 때문이 아니고 ‘무기력함’ 때문에 발생합니다. 누구나 역사의 새로운 장 위에서는 미숙자입니다. 역사의 새로운 장은 모든 사람을 아마추어로 만듭니다. 정보통신 시대에 누가 완숙자입니까. 빌 게이츠인가요?”

― 여권신당은 어떤 정당이 돼야 하는 겁니까.

“한국 정치는 1박(朴)2김(金), 즉 박정희와 양김이 무려 40년을 지배해온 체제입니다. 군 출신, 기업인, 행정관료가 주체가 된 박정희식 정당이 공고해지면서 야당은 자기변신을 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970년대초 40대 기수론이 그것입니다. 당시 야당의 원로들은 그래도 후배들을 키울 줄 알았고, 40대 후배들을 인정하고 그들을 어떻게 키울 것인가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그런 선배들의 후광을 입고 성장한 사람들이 이제는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사회의 변화를 감지하고 새로운 세대의 성장을 배려할 줄 아는 중진이 존재하는 사회가 원숙하고 발전적인 사회죠. 왜 미숙하고 어리다고 욕만 하느냐 이겁니다. 선배들의 후광을 입고 40대 기수론을 외쳤던 분들이 말이죠.

새로운 정당은 ‘이 당은 내 당’이라고 생각하는 당원을 가진 정당을 말합니다. 개인의 카리스마로 만들어진 정당이 아니라 당원들의 합의에 의해 꾸려지는 정당을 말합니다. 가장 본질적인 문제는 우선 정당인의 구조가 바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 독자신당이냐, 통합신당이냐를 둘러싼 당내의 갈등과 대립이 존재합니다. 안희정 씨가 그리는 신당은 어떤 구조를 지향하는 겁니까.

“지난번 대선은 지난 시절 ‘수평적 정권교체’를 지지했던 세력과 ‘노사모’로 대표되는 참여하는 시민연대 세력이 같은 가치를 공유하며 싸워 새 정권을 창출했습니다. 이것이 역사의 힘입니다. 이 두 세력이 하나의 가치를 위해 뭉칠 수 있는 여건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봅니다. 당의 선배들이 지금 노력하고 있는 중이고, 저는 그 결과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옳았다”

― 내년 총선에는 출마하는 겁니까.

“올초 청와대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선언하자 언론에서는 바로 출마를 기정사실로 만들더군요. 원래 자신을 위해 사람을 모으는 일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남을 위해 사람을 모으는 일은 쉽습니다. 명분도 있고요. 그런 역할을 하는 것이 제 적성에 맞습니다. 더 편안하고요. 무대 위에서 망신당할 일이 없으니까요. 저는 기본적으로 이 세상이 조금이라도 남을 위해 살았던 사람과 오직 자신을 위해서만 살았던 사람들이 싸우는 구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젊은 시절 제가 설득해 고시 공부 포기하고 노동운동을 하고 감옥에 갔던 후배들이 자신의 인생이 실패했다고 믿는 그런 세상을 만들기 싫습니다. 우리는 옳았습니다.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좀 더 큰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 모두에게 ‘라이선스’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지요. 능력과 자질을 검증해야지요.”

― 그런 사람들을 네트워킹하고 발굴하는 역할을 자임하는 겁니까. 대통령으로부터 그런 일을 맡아 해보라는 은밀한 지시를 혹시 받으신 겁니까.

“대통령께서는 우리에게 ‘너희들은 나보다 역사에 더 충성하니까 그 점을 오히려 존경한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 선문답처럼 들립니다. 더 구체적으로 앞으로 어떤 일을 하고 싶은 겁니까.

“제가 되뇌는 말이 있어요. 저는 배지를 달든 안 달든 집권당의 사무총장이 될 거다. 21세기 신주류의 형성, 그리고 집권당의 사무총장론이 개인적으로 자주 생각하는 제 자신의 진로입니다. 신주류론은 세대교체, 역사적 주역의 교체를 의미합니다. 20세기식 빼앗고 거꾸러뜨리는 방식의 세대교체론이 아닌, 시간이 흐르면서 사회의 패러다임이 바뀌면서 자연스럽게 이뤄지는 세대간 역할의 변화, 그것이 21세기 신주류론이죠.”

― 신당이 뜨자마자 사무총장을 하시는 겁니까. 그렇게 예정돼 있는 겁니까.

“서른여덟 살의 나이에 JP는 공화당의 당의장을 했습니다.(오랜 시간의 침묵) 또 반대로 얘기하면, 하늘에서 땅까지 왔다갔다 하는 감은 있지만 저는 이번 재판에서 무죄 선고를 받으면 정계 은퇴 선언을 해버리고 싶기도 해요.”

― 왜요?

“그만 하는 겁니다. 어찌 보면 내 몫은 다 한 겁니다. 지난 10여 년을 아주 어렵게 보내면서 제 개인도 가정도 엉망이 된 측면이 있어요. 애들도 제대로 못 키웠고 집사람도 제대로 건사하지 못했습니다. 정서적으로도 피폐해져 있고요. 정치는 한 마디로 한 개인에게는 남는 장사가 아닌 것 같아요. 나한테 큰 영광과 자존심과 긍지도 주지 못하는 이 일을 왜 계속해야 하는 것인지…. 집권당 사무총장을 해 보고 싶다는 의욕과 정계를 떠나고 싶다는 은둔자적 생각이 왔다갔다 하는 거예요.

인정사정 안 보고 출세 한번 해보자는 사람들로 가득한 이 사회 현실 속에서 제가 이 정도로 ‘됐습니다’하고 겸양을 보이고 훌쩍 떠나버리고 싶어요. 딱 반반입니다. 지역구에 내려가서도 그랬어요. 새마을부녀회원들과 대화하는 자리에 제 후배들도 많이 있었는데, ‘후배들 중 금배지 다는 사람 나와도 상관 없다. 나 배지에 연연하지 않는다’고 그랬어요. 대한민국에서 국회의원 안 해도 됩니다. 후배들은 질겁하지요. 그런 얘기 하지 말라고요.

한 초선의원이 대통령이 되는 그 긴 과정을 본 사람입니다. 대통령 관저에 가서 대통령과 식사를 하는 데까지 왔으니 더 욕심부리면 부잣집 아들이 더 부자가 되려고 아둥바둥하는 꼴이고… 나보다 더 헝그리 정신을 가진 사람이 도전한다면 그 사람 밀어주고 싶어요.”

― 집권당 사무총장이 되고 싶다는 말은 또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겁니까.

“40대 후반쯤 가서 남의 욕이나 하고 사는 그런 무기력한 인간이 되기는 싫다는 겁니다. 그리고 마담 뚜의 역할, 남을 도와주고 밀어주는 역할을 하고 싶은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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