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4화 올림픽 반세기 김성집|전세기로 멜번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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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1956년 11윌2일밤 멜번올림픽 한국선수단 49명은 여의도 비행장에서 KNADC4전세기에 몸을 싣고 장도에 올랐다
KNA는 우리나라 최초의민항기.
우리선수단이 전세기편으로 해외원정길에 오른것도 첫 기록이었다.
태극기를 앞세우고 태극마크가 선명한 우리비행기를 타고 올림픽에 출전하는 기분, 그감격을 요즘의 선수들은 실감하지 못할 것이다.
이날 출국에 앞서 우리 선수단은 경무대로 이대통령을 방문, 단기를 받고 격려의 말을 들었다.
이어 덕수궁에서 결단식을 갖고 필승을 다짐했다.
이제 우리 선수단의 면모를 살펴보면 여자선수가 1명도 없는게 우선 눈에 띈다.
런던과 헬싱키대회엔 육상에 1명씩을 출전시켰으나 세계수준과 너무 큰 격차를 보이게 되자 이번엔 아예 선발조차 안했다.
나는 당시 36세.
우리선수중 최고참이었다.
라이트급의 김창희(34)와 함께 런던·헬싱키대회에 이어 세 번째로 올림픽에 도전하는 것이었다.
나는 당시 김창희·최항기와 함께 대한중석에 몸을 담고 주로 한국체육관(초동)에서 역도훈련을 계속해왔다.
선수 35명중 30대의 노장이 10명이나 됐지만 20세 전후의 고교생도 3명이나 끼어있어 옛날에 비하면 많이 젊어진 편이었다.
마라톤의 이창무(양정고)·임화동(전남사대부고), 복싱의 표현기(성북고)등이 고교생 유망주였다.
올림픽에 첫출전하는 사격엔 감독겸 선수인 김윤기(육군중령)와 추화일(육군중사)등 군인2명이 출전하고 있었다.
단체경기중 유일한 종목인 농구는 선수선발을 둘러싸고 말썽이 많아 최소인원인 10명이 뽑혔는데 이가운데는 후일「농구의천재」라는 명성을 얻게되는 김영기(고려대)가 포함돼있다.
우리선수단을 실은 KNA전세기는 홍콩과 마닐라를 거쳐 3일만에 호주멜번에 도착했다.
20일이나 걸리던 런던·헬싱키여로에 비하면 행복에 넘친 여행길이었다.
멜번은 인구1백50만명, 젊은나라의 젊은도시였다.
계절은 바닷바람이 상쾌하게 느껴지는 초여름.
멜번올림픽은 올림픽역사상 처음으로 유럽과 아메리카대륙을 떠나 열리는 대회였다.
뿐만아니라 남반구인 까닭으로 세계가 겨울을 맞고 있을 때 이곳은 여름철인 것이다.
우리선수단은 델번교외 하이들버그에 자리잡은 선수촌에 여장을 풀었다.
8백50동의 아파트군으로 이뤄진 선수촌은 중앙에 소련선수단을 중심으로 위성국가군이 자리잡고 자유진영 선수단은 그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게 인상적이었다.
2백70만 파운드(약6백만달러)가 투입돼 건설된 선수촌은 올림픽이 끝난후 일반에 분양된다고 했다.
그런데 막대한 건설자금은 각국 선수단이 지불하는 차용료로 거의 충당된다 하니 정부당국은 일석일조의 이득을 보게 되는 것이다.
우리선수단은 아시아국가들과 그룹을 이뤄 숙소가 배정됐는데 식당에서는 양식과 중국요리 두종류만 제공 됐다.
멜번엔 올림픽관광객 10만여명이 몰려 호텔이 만원을 이루자 민박이 성황을 이뤘다.
시당국은 이룰 위해 여유가 있는 일반가정에 침대 1만5천여개를 빌려주고 검사까지 모두 마쳤다 한다.
호텔숙박비가 하루 5, 6파운드인 반면 민박은 1파운드로 충분했으니 일반 관광객들도 이를 크게 환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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