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요원, 美외교관 어깨 부러뜨렸는데 쉬쉬하는 이유는?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미국 외교관이 모스크바 미국 대사관 앞에서 러시아 연방보안국(FSB) 요원에게 폭행을 당했다고 워싱턴포스트(WP)가 29일(현지시간) 보도했다. 폭행 사건뿐 아니다. FSB가 모스크바뿐 아니라 유럽 전역에서 미국 외교관들을 상대로 한밤 중에 집을 찾아가거나 뒤를 따라다니는 등 위협을 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6일 모스크바에서 FSB 요원이 모스크바 미국 대사관에 들어가려던 미국 외교관을 공격했다. 이 외교관은 어깨뼈가 부러지는 등 부상을 입고 병원으로 후송돼 치료를 받았다. 모스크바 미국 대사관 앞에는 FSB 요원이 경호 목적으로 상주한다.

이 외교관이 공격을 받은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WP는 미국 고위 관리를 인용해 이 외교관이 러시아 정보기관을 피해 대사관으로 피신하는 중이었다고 전했다. 또 다른 고위 관리는 "그 외교관이 미국 국무부 직원으로 가장한 채 미국의 스파이로 활동하고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미 국무부와 중앙정보부(CIA)은 이 사건에 대한 질문에 답변하지 않았다고 WP는 보도했다.

이처럼 중대한 사건이 외교 문제로 비화하지 않은 이유도 수수께끼로 남았다. WP는 "국무부가 주 워싱턴 러시아 대사에게 전화해 이 사건에 대해 항의했지만, 그밖에 양국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선 공개되지 않았다"고 전했다.

모스크바에선 그 동안 미 외교관을 대상으로 한 위협이 빈번히 발생했다. 누군가가 외교관 차량의 타이어에 펑크를 내거나 교통 경찰이 외교관 차량을 집요하게 단속하는 식이다. 2012년부터 2년간 주 모스크바 미국 대사를 지낸 마이클 맥파울은 러시아 정부의 돈을 받은 시위대에 시달려 곤욕을 치렀다. 러시아 정보기관 요원이 맥파울의 자녀를 학교까지 따라가는 일도 있었다. 맥파울은 2014년 2월 집안 사정을 이유로 주 모스크바 미국 대사를 사임했다.

이 같은 러시아 정보기관의 미국 대사 괴롭히기는 유럽 전역에서 보고되고 있다고 WP는 전했다. 주된 수법은 외교관이나 외교관의 가족 따라다니기, 초대를 받지도 않았으면서 외교관이 주재하는 모임에 참석하기, 기자들에게 돈을 건네 부정적인 기사를 쓰게 하기 등이다.

WP는 "러시아 정보기관이 미국 대사를 위협하는 일은 늘 있어왔지만 최근엔 도가 지나쳐 범죄에 가까워지고 있다"며 우려를 나타냈다. 러시아 주재 외교관들이 백악관으로 보낸 비밀 문건에 따르면 러시아인들이 한밤 중에 미국 외교관의 집에 침입해 가구 위치를 바꿔놓고 전등과 TV를 켜놓은 뒤 가버리는 일도 있었다. 미국 외교관 집의 거실 카펫에 누군가가 대변을 보고 간 사건도 보고됐다.

오바마 정부에서 대(對)러시아·우크라이나·유라시아 국방담당 차관보를 지낸 이블린 파카스는 "이유가 어찌 됐든 간에 FSB 요원이 미국 대사관 앞에서 미국 외교관을 폭행했다는 사실은 러시아 보안당국이 갈수록 난폭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며 "그처럼 폭력적인 전략을 동원한다는 것은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현상"이라고 지적했다.

마리아 자카로바 러시아 외교부 대변인은 WP의 해당 기사에 대해 트위터에서 "외교는 상호간의 호혜(互惠)적 관계를 바탕으로 한다. 미국이 미·러 관계를 망쳐놓을수록 러시아에서 일하는 미국 외교관들도 힘들어질 것"이라고 반박했다. 미국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병합 사태 이후로 EU와 함께 대러시아 국제 재제를 주도하고 있다. 국제 재제와 유가 폭락으로 인해 러시아는 루블화가 지난 1년 간 18% 폭락하는 등 심각한 경제난을 겪고 있다.

이기준 기자 foridealist@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