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렉시트 후폭풍 "우리는 영국인 아닌 유럽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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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유럽공화국을 꿈꿨던 윈스턴 처칠이 우뚝 서 있는 영국 런던의 의회광장. 25일(현지시간) 오후 성난 목소리들이 광장을 채웠다.

이곳에서 로렌 킹엄은 ‘유럽에게, 우린 여전히 당신을 사랑한다’는 글귀를 들고 있었다. 그는 "나는 여전히 헝가리·불가리아·라트비아·히스패닉과 함께 일한다. 제일 친한 친구가 스페인인"이라며 "유럽을 사랑한다"고 했다. 그리곤 "24일 결과를 보곤 울었다. 나를 대표하지 않는다. 제2 국민투표를 요구하는 이유"라고 했다.

주변에선 ‘난 영국인이 아니라 유럽인이다’,‘EU가 옳다(Yes to EU)’란 글귀가 보였다. ‘편협성·파시즘에 반대, 보리스·패라지·고브의 탐욕에도 반대’란 문구도 있었다. 탈퇴 운동을 이끈 보리스 존슨 전 런던시장과 영국독립당의 나이절 패라지, 마이클 고브 법무장관을 향한 비판이다.

이곳으로부터 200㎞ 떨어진 글래스턴베리에선 26일 세계적인 록페스티벌이 열렸다. 세계무대에서 활동하는 음악인들과 상대적으로 젊은 세대들이 함께 어울린 자리였다. 울분을 공유했다.

가수 빌리 브랙은 "많은 젊은이들이 탈퇴할 정도로 나라가 멍청하진 않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투표소에 갈 이유가 없다고 여겼거나 다른 이가 하겠지 생각했을 수 있다"며 "그들을 비난하려는 게 아니다. 실수를 바로잡자는 것이다.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했다.

국민투표 이후 혼란상을 보고 자신의 선택을 후회한 이들도 나타났다. 탈퇴 진영의 장담과 달리 세계경제가 곤두박질치고 영국도 어수선해져서다. 탈퇴 진영의 말바꾸기 또는 뒷걸음질도 이어졌다. 라이언 윌리엄스(19)는 "투표소에서 1분 정도 망설였는데 친구들이 잔류가 많아 반격한다는 의미로 탈퇴를 선택했다. 변화하면 재미있을 것 같았다"며 "이젠 이런 내가 싫다"고 했다. 유럽으로 가려다 환전소에 들렸던 이는 "1파운드=1유로, 잘 가라 보리스"란 글을 트윗했다. 국민투표 전엔 1파운드를 내면 1.3~1.4유로 정도는 받았다.

정치권과 언론계를 중심으론 “어떻게 하면 EU 잔류토록 할 수 있느냐”는 목소리가 나오고 시작했다. 토니 블레어 전 총리는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고 했다.

EU 탈퇴를 공식 요청하는 리스본 조약 50조 발동을 지연하다보면, 새 총리도 브렉시트 혼란상 때문에 결국 발동하기 어려워지는 게 아니냐는 분석이 영국 가디언에 실렸다.

국민투표가 자문 성격인 만큼 의회가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팀 패런 자유민주당 당수는 “총선 공약으로 EU 잔류를 내걸겠다”고 했다. 노동당 소속인 데이비드 라미 의원은 “하원의원 500명(총원 650명)은 잔류 의견”이라며 “브렉시트 관련 법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의원들이 투표권을 행사하면 된다”고 했다. 이어 “이제 먼지가 가라앉고 브렉시트 이후 현실이 보이기 시작했다”며 “탈퇴 계획을 두고 국민투표를 다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가운데 존슨 전 시장이 신문 기고를 통해 "탈퇴 지지자들도 52대 48이 압도적인 게 아니란 걸 받아들여야 한다"며 "영국은 EU 단일시장에 접근할 수 있다. 유일한 변화는 EU의 불투명한 입법 과정과 항소할 수 없는 유럽재판소에서 빠져나오는 것 뿐"이라고 주장했다. 노르웨이식 유럽경제지역(EEA) 모델에 가깝다. 잔류파 진영이 "분담금은 더 내고 이민 제한도 못하는데 EU 의사 결정 과정에 참여할 수 없다. EU 잔류가 낫다"고 했던 방안이다.

런던=고정애 특파원 ockh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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