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데스크 view &

브렉시트 분노의 바람, 한국서도 불 수 있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경제 08면

김준현
김준현 기자 중앙일보 팀장 겸 경제에디터
기사 이미지

김준현
산업부장

미디어 관련 세미나 참석 차 5월 하순 영국 런던에 며칠 머물렀다. 명성대로 런던은 대영제국의 화려했던 유산과 글로벌 금융·패션·지식산업의 중심지로서의 현대적 세련미가 잘 조화돼 뉴욕·도쿄 등지와는 또 다른 매력을 풍겼다.

부끄럽지만 오랜만에 맡아본 런던의 향기에 취해 브렉시트(Brexit·영국의 EU 탈퇴)의 조짐을 감지하지 못한 건 물론이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라고 너스레를 떨어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지나치게 많아 보인 이슬람계 주민들과 거리 곳곳의 노숙자에서 브렉시트를 예감했노라고.

브렉시트를 촉발한 요인은 다양하다. 하지만 결정적인 건 “못 살겠다, 바꿔보자”라는 영국인들의 분노다. 가뜩이나 살림살이가 빡빡한데 난민 등 이주민은 계속 늘고, 그러다 보니 주거비용·실업률·세금이 갈수록 증가한다.

영국인들은 이 모든 걸 EU 탓으로 돌렸다. EU가 영국의 자율권을 무시해 이런 문제들이 생겼다고 믿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당장 생활고를 겪는 저소득층일수록 강할 수밖에 없다. 브렉시트를 이끈 동력이 저소득·저교육 층이었다는 영국 일간지 가디언의 분석은 이를 증명한다.

가디언에 따르면 연봉 중간값인 2만5000파운드(약 4000만원)를 넘어서는 곳에서는 잔류 성향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또 고등교육을 받은 주민이 35% 이상이 있는 모든 선거구에서 잔류가 높게 나온 반면 고등교육을 받지 않은 주민이 35% 미만인 선거구에선 탈퇴가 더 많았다. 가난하고 못 배운 계층이 “못 살겠다, 바꿔보자”에 찬성표를 더 많이 던졌다는 얘기다. 브렉시트를 계층간 갈등의 산물로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U에 대한 반발 이면에는 영국 내 가진 자, 기득권층에 대한 분노가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유사한 일이 미국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이른바 ‘트럼프 현상’이다. 무역에서의 보호주의, 정치에서의 미국 우선주의, 이민자에 대한 차별주의 등을 내세운 트럼프는 도시 중하층민, 농업지역, 쇠락한 공업지역의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다. 이 또한 못 살겠으니 바꿔보자는 저소득층의 마음을 파고든 것이다. 막말, 음모론, 기괴한 퍼포먼스로 조롱당하던 도널드 트럼프였지만 이제 당당한 대통령 후보가 된 이유다.

브렉시트와 트럼프현상을 촉발한 “못 살겠다, 바꿔보자”는 한국에서도 이미 진행형이다. 한국 사회를 옥죄었던 지역주의 갈등은 계층간·세대간 갈등으로 바뀐지 오래다. 계층간 소득과 부의 격차는 외환위기·금융위기를 거치며 더욱 심화되고 있다.

IMF에 따르면 2013년 기준 아시아 22개 국가 중 한국의 소득 불평이 가장 심했다. 저성장이 고착화되면서 소득이 늘어날 가능성은 희박해지는데 전세의 월세화, 교육비 증가 등으로 주머니 사정은 갈수록 쪼그라들고 있다. 수출이 17개월째 마이너스 성장하고 있고, 청년실업률은 매달 신기록을 작성해가고 있다. 모두 국민의 분노지수를 높이는 요인이다.

불평등·부조리의 골이 깊어질수록 영국·미국처럼 극단적 선택의 가능성은 커진다. 물론 영국인이 브렉시트를 결정했고, 미국인이 트럼프를 선택한다면 그 또한 역사의 한 부분이다. 하지만 그들은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

브렉시트의 결과는 고립주의·보호주의의 강화로 나타날 것이다. 신민족주의, 반동의 정치가 거세질 수도 있다. 역사는 이런 흐름이 어떤 대가를 치렀는지 이미 보여줬다. 브렉시트가 몰고 올 파장은 그래서 무서운 것이다.

우리 내부의 불평등과 부조리는 이미 위험 수위로 올랐다. 지난 4.13 총선의 결과는 그런 사회현상, 국민의식의 한 단면을 보여줬다. 그러나 정치권이 이런 변화를 실감하고 있는 것 같진 않다. 20대 국회는 시작부터 삐걱거린다. 대우조선해양 관련 비리 등 5~6개에 달하는 각종 청문회 개최 여부,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의 활동 기한 연장, 대기업 법인세 인상, 역사교과서 국정화 등과 관련된 법안을 놓고 여야는 벌써 으르렁거리고 있다. 우리의 분노지수는 다시 치솟는다. 이제 관심은 내년 12월 대통령 선거다. 지치고, 분노한 국민이 어떤 선택을 할지 두렵다.

김 준 현
산업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