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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촌 누비며 "책빌려 드립니다"|자동차 대본점 어떻게 운영되고 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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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지금은 사라진 풍경이지만 오늘처럼 책이 흔하지 않던 시절, 40대 이상의 서울 사람들은 청진동골목의 대본점과 얽힌 기억을 갖고 있다. 최근 서울의 아파트촌에는 소형 짐차에 수백권의 책을 싣고 몇시간씩 머무르며 책을 빌려 주고 거둬 가는 순회 대본점이 새로운 아파트 풍속도로 자리잡고 있다.
『여기, 13동 903호, 책 가져왔어요. 새 책 뭐 재미있는 것 없어요?』 『「레테의 연가」는 보셨읍니까? 이문열씨의 소설인데요. 요즈음 많이들 읽으시던데요…』
17일 하오4시 서울 반포동 한신아파트단지안. 26동 길건너 슈퍼 마키트로 통하는 길목에 소형 짐차를 개조하여 차안3면에 3단의 쇠로 된 서가를 설치한 후 책을 가득 채운 순회 대본점이 머무르고 있었다. 『주로 30대와 40대초반의 가정주부들이 고객인데, 가볍게 읽을수 있는 책을 많이 찾아요. 아이들을 데리고 오는 어머니도 많은데 역시 책을 읽는 엄마의 아이들이 책을 읽더군요』 4개월째 아파트촌 순회 대본점을 하고 있다는 고승현씨(29)의 얘기다. 여성지등 월간잡지를 제외하고 최근 가장 인기있는 책은 「버트리스·스몰」의 『아도라』. 「시드니·셀던」의 『천사의 분노』, 황석영씨의 『장길산』, 김수현씨의 『생의 한가운데』도 많이 읽힌다.
이병주, 박완서씨도 꾸준히 읽히는 작가라고. 고씨는 또 실내장식과 패션등에 관한 외국잡지도 구비하고 있는데 상당히 호응도가 높다.
『책방을 찾는 번거로움이 없을 뿐더러 잡지들은 한번 읽고나면 그만이라 사기가 아까왔는데 돈을 조금 주고 빌어볼수 있으니까 여간 편리하지 않아요』 가족 모두가 단골이라는 가정주부 이명희씨(42·29동)의 얘기다.
순회 대본점 주인 고씨는 매주 화·목요일 오후(3∼7시)에 한신아파트촌을 찾는다. 월·금요일 오전엔 동부이촌동 현대아파트촌, 수·토요일 낮에는 개포동 주공아파트촌 식으로 주중 스케줄이 짜여져 있다.
총 1천5백여권의 책을 갖고 있는 고씨는 한신아파트단지 내에 50여명의 단골을 확보하고 있다.
대본료는 해당 아파트 주민에 한해 동과 호수·전화번호·이름을 적어주면 보증금없이 사흘뒤 반납할 때 소설류가 4백원, 신간잡지는 6백원, 외국잡지류는 1천원이다. 신용거래인데 가끔은 책이 분실된다고 고씨는 씁쓸해 한다.
아파트촌에서 순회 대본점을 열려면 관리사무소나 부녀회등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데 서울에만도 이와같은 대본점을 운영하는 사람이 30여명은 되리라는 것이 고씨의 추산이다. <박금옥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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