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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시련 끝에 차도보이는 "선진국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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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거의 완벽한 복지국가제 실시에서 오는 근로정신의 결여와 국가의존심의 증대, 빈발하는 노조파업으로 인한 산업발전의 지체, 아직도 뿌리깊은 신분계급의식과 변화를 꺼리는 보수성, 그리고 IRA테러로 상징되는 구 식민주의의 후유증등 영국을 괴롭히는 이른바「영국병」현상은 많은 사람들에게 영국의 장래를 어둡게 생각하도록 만든다.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미국의「밀튼·프리드만」교수는 수상하던 그해(76년) 늦가을 미CBS방송과의 회견에서『영국이 현재 가고있는 길을 계속한다면 영국의 민주주의는 조만간 종말을 보게될 것이며 남미 칠레와 같은 사태에 빠지게 될것』이라고 경고했다.
아직도「프리드만」교수처럼 영국의 장래를 비관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적지 않다.

<콧대센 긍지 여전>
그러나 8백년 민주주의의 전통을 지켜오고 3백년간 세계를 지배하여 쌓아올렸던 선진 영국의 저력은 결코 호락호락하게 볼 문제가 아니라고 느껴진다.
흐르는 물의 개념에서 보면 영국은 확실히 2류 국가로 밀려났다.
유수량도 줄어들었고 활력도 위축됐다.
그러나 저수지의 관점에서 보면 깊이와 저수량에서 아직도 단연 선진국이다.
그 점에선 경제대국 일본도 스스로 인정하고 있다.
투하된 사회간접자본과 생활환경에서 그렇고, 삶의 질과 생활의 여유에서 그렇고, 또 무엇보다도 확고한 민주주의 질서와 시민의식에서 그러하다.
영국사람들이 과거의 영화는 잃어버렸어도 콧대 센 긍지를 잃지 않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영국은 가장 먼저 산업혁명을 일으켜 제1번으로 선진국 대열을 구축했으며 이른바「영국병」으로 불리는 선진국병도 가장 먼저 앓고있다.
이제는 그 법도 치유단계에 접어든 감이다.
파업투쟁을 일삼던 노조들이 앞장서서『파업하지 않겠다』는 협약을 맺으며 외국기업의 대영투자를 유치하고 있는가 하면 노조를 탈퇴하는 근로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높은 실업률에서 오는 고용문제가 주요 원인이긴 하지만 노조내에 합리적 투쟁정신, 즉 신 현실주의가 강력하게 대두되고있다는 얘기다.
복지국가제도도 재정능력의 한계에 부딪쳐 과감하게 감량 조정하는 대신 민간경제활동을 자극하는 쪽으로 정책이 모아지고 있으며 국민들도 그것을 어쩔 수 없는 대세로 받아들이고 있다.
영국병을 치유하려는 국민의 자각과 정부의 노력은 점차 효과를 보기 시작해 83년 이후 유럽지역에서 영국경제의 회복속도가 가장 빨라 유럽경제회복의 견인차로서의 기대를 모으고있다.
지난3월까지 장장 1년간 끌어온 탄광노조파업의 비참한 좌절도 그러한 맥락의 산물로 볼 수 있다.
영국병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저력과 장래성을 좋게 평가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들이 확립·운영하고 있는 민주주의제도와 시민정신이다.
어느나라 보다도 상식이 지배하고 질서와 규범이 존중되며 서로 신뢰하는 사회를 만들었다.
성문헌법 없이 관습과 관례에 기초를 둔 커먼 로 (Comon low)로써 13세기이래 지금까지 민주주의를 지켜오고 있는 것 하나만 보아도 그들이 얼마나 상식에 투철한 사람들인가를 알 수 있다.
그들의 상식과 시민의식·민주주의 질서는 줄서기에서부터 잘 나타난다.
영국사람들은 버스를 타거나 상점에서 물건을 살 때 2∼3명만 모여도 어느새 줄을 선다.
민원을 다루는 관공서 또는 민간기구는 정확하게 접수 순서에 따라 처리하며 사람들은 그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철저한 공동체의식>
줄서기는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동시에 타인의 권리를 인정해주는 정신을 바탕으로 하는 것.
네거리와 같은 차가 밀리는 복잡한 교차로에 교통경찰을 세우지 않고 라운드 어바웃이라는 원형 교통시스팀을 만들어 바로 오른쪽 차에서 양보하여 진입하도록 처리하고 있는데 사고나는 일을 보지 못했다.
순서나 질서를 지키는 영국에서나 가능한 얘기일까.
영국에서 아이들은 전학시켜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영국사람들이 얼마나 남의 말을 신뢰하는가를 알 수 있다.
옮기는 학교에 찾아가 아이 나이가 몇 살이고 성적이 어느 정도라고 얘기하면 증명서 운운하는 일 없이 그 자리에서 그대로 받아주고 처리해준다.
그러다가 나중에 성적이 따라가지 못하거나 보다 우수하면 반배치를 바꾸어준다.
버스나 지하철 탈때 어쩌다가 미리 표를 못 사고 나중에 요금을 낼 때도 그것을 느낀다.
어디서 탔다고 말하고 거기에 해당되는 요금을 내면 그것으로 OK다.
따지거나 의심하는 눈초리를 보내는 일은 거의 볼 수 없다.
그만큼 남의 말을 믿는 풍토가 되어있다.
영국인들의 공동체의식도 살아보지 않고는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다.
83년 여름 약 석달간 비가 안와 정부(런던시)에서 절수캠페인을 시작하자 정원(영국의 집은 거의 예외없이 잘 가꾼 정원을 갖고있다)에 물을 주며 잔디를 가꾸던 영국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물주는 것을 중지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러한 공동체의식 때문에 런던시내 곳곳의 정원과 아름다운 생활환경이 보전유지 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됐다.
끝으로 영국에 주재하면서 가장 부럽게 여겼던 것은 원숙한 민주주의의 운용이었다.
모든 사회적 갈등과 이견은 민주주의 절차에 의해 거두어진다.

<원숙한「민주」운용>
테임스강변 웨스트민스터 의사당에서 집권당(현재 보수당)과 『왕의 충실한』야당(노동당및 사민·자유당연합)이 마주앉아 국정을 논의하고 거기서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을 보면 현대민주주의의 메카로서의 영국의 위치를 재인식시켜준다.
의장을 향해 왼쪽이 집권당, 오른쪽에 야당이 대면해서 약3m 떨어져 앉아있는데 그 사이에는 붉은줄(검선)이 그어져있다.
옛날에 칼싸움이 있을 때 그어진 금이다. 양쪽은 그 선을 넘지 않으며 국정을 자유자재로 토론한다.
그러다가도 국회개원식 이라든가 현충일 행사 때는 수상과 야당 당수를 맨 앞줄로 해서 여야당의 맞수들이 정다운 친구인양 어깨를 나란히 입장하는 모습은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훈훈하게 해준다.
각부장관들은 무슨 이슈가 있을 때마다 TV에 나와 야당의원·학자 및 일반시민들과 자리를 같이하여 거침없는 토론회를 갖고 국민의 심판을 기다린다.
그러한 민주주의 제도운영은 미국도 따라오려면 한참 걸릴 것이다.
영국이 이러한 장점과 자산을 지켜가는 한 영국의 장래를 누가 어둡다고 하겠는가.

<끝>
이제훈특파원 런던상주 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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