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 살리려 가습기 더 틀었는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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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시간은 자꾸만 뒷걸음질 친다. 2007년 11월 3일, 세 살배기 딸이 죽음 저편으로 건너가던 그날을 향해.

중앙일보, 피해자 109명 인터뷰
36% “호흡질환 뒤 더 늘려”
잠재적 피해자 227만 추산
병원은 무지, 정부는 방관

선민이는 기침을 자주 했다. 엄마는 2005년부터 하루 12시간씩 가습기를 틀었다. 물을 갈 때마다 살균제를 빼먹지 않았다. 그렇게 1년이 지났지만 선민이의 기침은 나아지지 않았다.

2007년 4월 엄마는 선민이의 가슴 부위가 움푹 들어간 걸 발견했다. 처음에 병원에선 모세기관지염이라고 했다. 하지만 증세는 더욱 악화됐고 선민이의 자그마한 목에 인공호흡기가 달렸다. 의사들은 원인을 알 수 없다고만 했다. 결국 선민이는 입원한 지 7개월 만에 눈을 감았다. 선민이 엄마 임동숙(36)씨는 중앙일보 취재팀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이는 점점 죽어가는데 병원에선 계속 원인을 모르겠다고만 했어요. 입원해서도 가습기를 계속 틀었죠. 저 때문에 아이가 죽었다는 자책감에 지금도 잠을 못 이뤄요.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가습기 살균제 사태는 무지(無知)가 키운 대형 참사였다. 병원은 원인을 놓쳤고 정부는 방관했으며 시장은 무책임했다. 가습기 살균제가 처음 판매된 1994년 이후 피해자가 수백 명으로 늘어났지만 제대로 된 조사나 진단이 이뤄지지 않았다. 질병관리본부가 2011년 8월 “가습기 살균제가 원인미상 폐손상의 위험 요인으로 추정된다”고 밝히기 전까지 17년간 소비자들은 아무런 정보도 없이 ‘죽음의 약품’을 흡입해야 했다.

특히 선민이 엄마처럼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중 상당수는 가족의 폐질환을 치료하기 위해 오히려 살균제 사용량을 늘린 것으로 나타났다. 중앙일보 취재팀이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1~4등급) 중 109명을 전화 인터뷰한 결과 39명(36%)이 “각종 호흡기 질환이 처음 발견된 이후 가습기 사용을 늘렸다”고 증언했다. 특히 이 중 24명(22%)은 “병원에서 가습기를 더 많이 틀어 습도를 조절해야 한다고 조언했다”고 답했다.

문제는 가습기 이용 시간이 늘면서 자연스럽게 살균제 사용도 증가했다는 점이다. 특히 어린 자녀를 둔 부모의 경우 가습기에서 나오는 세균이 아이들의 호흡기로 들어갈 것을 우려해 꼬박꼬박 살균제를 사용했다고 한다. 실제 1, 2차 가습기 피해 신고자 가운데 1, 2등급 판정을 받은 폐 손상 사망 피해자 95명 중 5세 이하가 67%(63명)였다. 가습기 살균제가 ‘안방의 살인자’ 였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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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세균 죽일 정도면 사람에게 나쁠 텐데…병원도 몰랐다” 

③ [가습기 살균제 리포트] 사진으로 읽는 피해자 109명 인터뷰



민관 합동 폐손상조사위원회는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한 적이 있는 잠재적 피해자를 총 227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지금까지 신고한 1000여 명의 피해자는 빙산의 일각일 수 있다는 의미다. 서울대 보건대학원장인 김호 교수는 “가습기 살균제 사건은 우리 사회의 구조적 문제점이 누적돼 발생한 인재(人災)이자 생활용품 화학물질에 의한 국내 최악의 참사”라며 “제2, 3의 살균제 사건을 막으려면 보건 당국의 화학물질 안전성 관리, 기업의 윤리의식, 의학계의 자성 및 시민의 철저한 감시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채윤경·정진우·윤정민·송승환 기자 pcha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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