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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 (글사진 이용우기자) 우록김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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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우록김씨는 우리나라 여러 귀화성씨 가운데 유일한 일본계 성씨다.
역사이래 수많은 왜인들이 선진문화국이자 원래의 조상나라이기도한 한국을 우러러 귀화해 왔지만 왜인조상을 내세우고 독자의 가문을 창립하지 않은 탓이리라.
전국에 6백여가구 3천여명. 올해로 귀화 3백93년만인 우록김씨는 그들을 한국인으로 만들어준 시조를 지극한 정성으로 모시며 그의 가르침을 따라 충·효·예·의의 한국인상을 어느 토착성씨 가문보다 더 잘 보여주는 한국인으로 깊이 뿌리내려 꿋꿋이 살아가고 있다.
시조는 김충선.
그는 1571년 전국시대의 일본서 태어났다. 원래의 이름은 사야가. 무예를 닦아 풍신수길의 오른팔 가등청정의 부하장수가 되었다.
폭력과 궤계로 일본을 통일한 풍신이 대륙침략의 야욕을 터뜨려 1592년 임진왜난을 일으킬때 그는 21살 나이로 가등의 선봉장이 되어 3천병력을 이끌고 4월13일 부산에 상륙했다.
그러나 그는 무인이면서도 학문에 뜻을 가졌던 지성의 사내였다.
그는 터무니 없는 풍신의 대륙침략 출병을 『까닭없이 군사를 일으켜 군자의 나라를 짓밟는것은 하늘을 거스르는 죄』라고 생각했다. 기회를 보아 항복, 꿈에도 그리던 한국인이 되리라 작정하고 바다를 건넜다.
동래에 상륙한지 일주일만인 4월20일 경상좌우병사 김응서·박진등에게 몰래 글을 보냈다.
『내가 비겁하고 못난 것도 아니요, 나의 군대가 약한 것도 아니나 조선의 문물이 일본에 앞서 있고 학문과 도덕을 숭상하는 군자의 나라를 짓밟을수 없어 귀순하고싶다.』
깃발을 돌이켜 조선의 장수가 된 그는 울산·경주·영천등지서 왜적을 무찔렀다.
아군에게 화포와 조총이 없음을 보고 화포·조총 만드는 법과 사격술을 진중에 보급, 왜적을 서생포 (현경남울주군서생면)로 내쫓아 마침내 18개 왜성을 탈환하게 됐다.
그의 역전의 무공과 충정에 감복한 선조임금은 친히 그를 불러 『바다를 건너온 모래 (사)를 걸러 금(김)을 얻었다』며 뜻을 살려 김해김씨의 성과 「충선」이란 이름을 지어주었다.
원래의 김해김씨와 혼동을 피해 세가지 마을 이름을 따 우록김씨로 칭하면서도 호적에는 아직 김해김씨로 올라 있는 연유다.
7년전쟁이 끝난뒤 충선은 나이 30에 진주목사 장춘점의 딸을 아내로 맞아 우록골에 터를 잡았다.
선조36년 (1603년) 북방에서 여진족이 국경을 어지럽히자 그는 국경방어를 자청, 10년간 잉방소를 지키다 물러났고 1624년 이괄의 반란때는 또다시 출정해 괄의 부장 서아지(강왜장)를 목베어 평정에 공을 세웠다.
1636년 병자호난이 났다. 자신이 10년간이나 지켰던 북방이 일시에 오랑캐들의 말발굽에 허물어졌다는 소식을 들은 66세의 충선은 분연히 노구를 일으켰다.
의병을 모아 경기도광주의 쌍령에 1백50명의 병사를 매복시켰다. 연전연승에 도취된 호병에 조총을 퍼부어 그 시체가 시산시해를 이루었다.
호병의 코를 베어 전대에 담고 남한산성으로 달리던 중 인조임금이 이미 청장 용골대에게 화평을 청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예의의 나라 군신으로서 어찌 오랑캐앞에 무릎을 꿇는단 말인가. 춘추의 대의도 이제 끝이 났구나』 그는 땅을 치며 통곡했다.
낙향한 그는 우록골에 은거하다 1642년 72세로 세상을 떠났다. 벼슬은 정2품 정헌대부지중추부사.
그는 후손들에게 자상한 가훈과 이웃과 싸우지 말라, 세금은 첫기일을 넘기지 말라, 술을 지나치게 먹거나 노름하지 말라는등 15조의 향약을 남겨 지키도록 했다.
그의 아들인 경원(상호군·증병조삼판)·경신(증 공조삼판)·우상(상호군)·계인(부호군)·경인(증 사비삼판)등 5형제가 모두 벼슬길에 나서 초기 우록김문의 기틀을 다졌고 경원의 둘째아들 진영은 승정원좌승지경 삼찬관에 올랐다.
4세 여삼은 노모가 죽자 삼성산유택에 초막을 치고 3년간 시묘를 극진히하여 그 행적이『효행록』에 기록돼 있고 오늘날 후손들은 그래서 삼성산을 시무산으로도 부르고 있다.
김씨네는 3대에 걸쳐 시조의 후광을 입어 문·무과와 음사등으로 20여명이 벼슬길에 나섰고 충효의열의 가풍을 굳건히 지켜 영남의 양반가문으로 기업을 닦았다.
김진걸(한성부좌윤·부총관) 김여규(공조삼판) 김여채(지중추부사) 김여명(가선대부) 김종기(지중추부사) 김창재(탁충장군) 김오남(가선대부) 김시욱(지중추부사) 김용하(통정대부) 김재인(가선대부)등이 그중에도 두드러진 이름.
그러나 후손들은『영달하기를 바라지 말라』는 시조 김충선의 유언에 따라 부귀와 벼슬을 멀리 했던 탓으로 조선조후기에 이르러 족세를 크게 떨치지 못했다.
해방후에는 김지열전내무부장관이 법조계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고 45년간 교육계에 몸바친 김재덕씨가 5·16민족상(교육부문)을 수상, 가문을 빛냈다.

<지명인사|종친회제공·무훈>
▲김지열(전내무장관) ▲김재덕(평통자문위원·전대구무성국교장) ▲김재기(대검찰연국관) ▲김재두(일신방직고문) ▲김재도(대한성급협회상무) ▲김상재(삼아정공대표) ▲김형국(제일생명이사) ▲김재정(의학박사) ▲김갑영(인천대교수·법학박사) ▲김병남(의학박사) ▲김재진(대법원장비서관) ▲김재우(한국통신공사과장) ▲김병한(서예가·문경여중교감) ▲김태환(전매청공제회 전무) ▲김창열(안기부서기관) ▲김윤희(안기부사무관) ▲김재석(천우운수대표) ▲김재만(풍진직물대표) ▲김영환(대구성동국교교장) ▲김상순(청송내용국교교장) ▲김진희(대한토지개발공사이사) ▲김진신(대한상사영업부장) ▲김성환(성진직물대표) ▲김재율(동광수도대표) ▲김준환(태흥직물대표) ▲김주환(평통자문위원·태양파이프대표) ▲김내환(협신수도대표)

<다음차례는 거제 반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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