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분석] 12조 쏟아붓고 일단 버티자는 정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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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의 여정이 얼마나 길지, 도중에 어떤 고비를 만나게 될지 누구도 확신할 수 없다. 차에 기름을 든든히 채운 뒤 일단 출발하는 수밖에 없다.”

구조조정 새 사령탑 유일호 “자본확충펀드 11조”
‘조선·해운 부실 → 금융권 확산’ 차단막은 갖췄지만
산업개편 큰 그림 없이 조선 빅3 자구안만 나열

8일 정부 한 고위 관계자가 ‘구조조정 추진계획’을 발표한 직후 한 말이다. 이날 발표된 대책의 핵심과 한계가 이 발언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시장이 구조조정과 관련해 가장 두려워하는 건 조선·해운업에서 시작된 불이 금융권으로 번져 경제 전체가 신용 경색에 빠지는 상황이다. 국책은행 부실에 대비해 ‘자본확충펀드’를 조성키로 한 건 이를 막기 위한 차단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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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확충이 가장 시급한 수출입은행엔 정부가 보유한 공기업 주식 1조원어치를 직접 출자하기로 했다. 한국은행도 최대 10조원을 정부 소유인 기업은행에 대출해 주기로 했다. 이 자금에 기업은행이 1조원을 보태 11조원 한도의 자본확충펀드를 만든 뒤 국책은행의 자본확충이 필요할 때 일정 금액을 꺼내 쓰기로 했다. 구조조정호의 ‘기름’은 든든히 채운 셈이다.

이와 함께 정부는 이달 말 조선업을 특별고용지원업종으로 지정, 실업자 지원 등 충격 흡수에 나서기로 했다. ‘컨트롤타워’가 없다는 지적에 정부 내 구조조정 추진체를 차관급 협의체에서 유일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주재하는 관계장관회의로 격상시켰다. 부총리와 금융위원장, 청와대 경제수석 등이 청와대에서 비공식적으로 모여 하던 이른바 ‘서별관 회의’ 대신 부총리가 구조조정의 전면에 나선 셈이다.

그러나 조선·해운업을 비롯한 취약 산업을 어떻게 개편하겠다는 ‘큰 그림’은 빠졌다. 앞으로 구조조정호가 어디로 향해 가야 할지 지도도 없이 출발했다는 얘기다. 관련 업종 전망 등 미래가 불확실한 탓에 당장 산업 개편의 그림을 그리기 어려운 건 사실이다. 그러나 구조조정의 주체와 성격 역시 여전히 불분명하다. ‘산업 구조조정’이란 타이틀이 붙은 조선업 구조조정 계획의 경우 선제적 사업 재편이나 조정 없이 ‘빅3’가 제출한 개별 기업 차원의 ‘자구안’을 중심으로 짜였다. 2018년까지 불황이 지속되는 것을 가정해 인력과 설비를 감축, 그때까지 ‘버티기’를 하겠다는 게 사실상 골자다. 그러나 이후에도 업황이 개선되지 않는다면 본격적인 구조조정의 부담은 다음 정부로 넘어갈 수밖에 없다.

정부가 산업 구조조정에 적극 나서는 데 주저하는 건 ‘책임론’과도 연관이 있다. 이번 계획 마련 과정에서도 구조조정의 실탄 마련 부담은 한국은행에, 부실 심화의 책임은 국책은행에 각각 돌리려는 듯한 모습이 역력했다. 임금 반납·조직 축소·임직원 전직 제한 등 국책은행의 책임을 묻는 내용은 담겼지만, 정부와 정치권 출신 ‘낙하산’ 방지 대책이나 감독 책임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다. 중소기업 지원을 위해 설립한 신용보증기금을 이번에도 대기업 구조조정에 동원한 건 나쁜 전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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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검찰 특수단, 부패 수사 1호는 대우조선…경영 비리 정조준
③ 대우조선 회계장부는 ‘비리장부’ 였다



김도훈 전 산업연구원장은 “산은은 정부 영향력 아래 있고, 또 정부는 정치권의 압력을 받는다”며 “정부와 정치권이 개입은 하면서 책임은 지지 않는 왜곡된 구조”라고 비판했다. 고려대 박경서(경영학) 교수는 “금융산업의 취약한 구조 탓에 부실기업 구조조정이나 인수합병(M&A)이 자본시장의 주도로 이뤄지지 못하는 게 근본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날 검찰총장 직속의 부패범죄특별수사단은 대우조선해양의 수조원대 분식회계 및 경영진 비리 의혹 등에 대해 본격 수사에 착수했다.

조민근·조현숙·서복현 기자 jmi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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