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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21세기 한·불 관계 분수령이 될 국빈방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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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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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우현
한림대 객원교수
전 주프랑스 공사 겸 문화원장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1~4일 프랑스를 국빈방문했다. 박 대통령의 이번 방문은 ‘한·불 상호 교류의 해’와 맞물려 어느 때보다도 역사적인 의의가 컸다.

올해 프랑스에서는 한·불 수교 130주년을 맞아 ‘한국의 해’가, 또 한국에선 ‘프랑스의 해’가 개최되고 있다. 양국 간에 처음 열리는 이들 ‘한·불 상호 교류의 해’는 한국과 프랑스 간의 특별한 관계를 보여 주는 뜻깊은 행사다.

회고컨대 프랑스는 현대사의 고비에서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준 중요한 우방이다. 우리 역사상 서양 군대와 최초의 무력 충돌이었던 병인양요 발생 20년 후인 1886년(고종 23년) 한·불 양국은 조불(朝佛)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다. 이 조약에 포함된 선교 자유에 관한 조항은 외국 선교사들의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해 이 땅에 신앙의 자유를 꽃피우게 하는 밑거름이 된다.

프랑스는 우리 독립운동 및 대한민국 태동과 깊은 인연이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상하이(上海)의 프랑스 조계지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파리는 유럽 내 한국 독립 외교의 중심지였다. 1919년 3월 임정 외무총장으로 파리에 도착한 김규식 선생은 파리 강화회의에서 대한민국 주권 승인 등 20개 항목의 공문서를 제출하는 것을 시작으로 이곳에서 21년 7월까지 독립운동을 전개한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파리 9구 샤토됭가 38번지에는 우리 정부 요청으로 2006년 3월 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파리위원부(1919~21)’라는 현판이 한글과 프랑스어로 새겨졌다.

또 파리의 국립 샤요극장은 48년 12월 12일 대한민국이 국제적으로 탄생한 역사적인 현장이다. 이곳 샤요극장에서 열린 제3차 유엔 총회는 대한민국을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하는 결의안(195호)을 48대 6(기권 1)으로 통과시켰는데 이는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장면 박사가 이끌었던 우리 대표단의 치열한 외교전이 거둔 쾌거다. 유엔의 한국 정부 승인은 6·25전쟁이 터졌을 때 유엔군 파병의 근거를 제공한다. 지난해 9월 18일 프랑스에서의 ‘한국의 해’ 개막 행사가 이 유서 깊은 샤요극장에서 열린 것은 묘한 인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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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기간 중 프랑스는 유엔군의 일원으로 1개 대대 규모의 병력(연인원 3200명)을 파병한다. 이 중 10분의 1에 해당하는 270명이 전사한다.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프랑스는 유럽연합(EU) 주요국 중 북한과 수교하지 않은 유일한 나라로, 한반도 문제에 있어 항상 우리 정부의 입장을 지지해 온 든든한 우방이다. 지난 3일 엘리제궁 정상회담 후 연 공동기자회견에서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은 북한의 핵 확산 위협의 심각성에 대해 언급하면서 프랑스는 한국과 “동맹(alliée) 관계”라고 말했다. (“la France est donc alliée à la Corée du Sud.”)

이번 정상회담에서 박 대통령과 올랑드 대통령은 ‘수교 130주년 공동선언’을 채택하면서 북핵 문제에 대해 “유엔 안보리 (대북제재) 결의를 철저히 이행하고 필요 시 추가 조치를 강구할 것”이라고 천명했다. 또 두 정상은 양국의 미래 성장동력 창출을 위해 창조경제와 문화융성 분야 협력을 획기적으로 확대하기로 했다. 프랑스는 과학기술 대국으로 한·불 양국은 항공·원전·고속철 등 분야에서의 협력을 이어 오고 있으며, 최근에는 방위산업과 우주 협력으로 지평이 확대되고 있다.

한·불 관계의 역사는 바로 우리의 근·현대사다. 지난 130년간 한국은 프랑스 경제지 ‘레 제코(Les Échos)’가 지적하듯이 ‘풍전등화’와 같았던 변방 국가에서 세계 11위의 경제대국이 됐다. 또 시끌벅적하기는 하지만 아시아에서는 몇 안 되는 민주국가다.

한국 이민자도 많지 않은 프랑스에서 한국어는 이제 대학수학능력시험인 바칼로레아에서 기본 선택 과목이 됐다. 문화대국 프랑스에서 한국의 문화적 위상을 단적으로 말해 주는 징표다. 프랑스는 우리 문화 서구 진출의 교두보다. 2일 파리에서는 유럽 최초로 한국 문화를 종합적으로 알리는 ‘K콘’ 행사가 개최됐는데 예매 3시간 만에 1만여 석이 모두 매진됐다. 프랑스뿐만 아니라 영국·독일 등으로부터도 모두 1만3000명이 모여들어 공연장 앞에서 전날부터 노숙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이번 국빈방문에서 박 대통령은 프랑스 측의 극진한 예우와 환영을 받았다. 이런 환대에는 한국이 이제 경제·문화강국일 뿐 아니라 근대 민주주의의 기수인 프랑스도 배출하지 못한 여성 대통령을 탄생시킨 민주국가라는 점도 작용했다. 또 프랑스 유학 경험이 있는 박 대통령이 파리6대학(피에르와 마리 퀴리 대학)에서 명예 이학 박사학위를 받으면서 불어로 답사를 한 것이 모국어에 대해 유난히 자부심이 강한 프랑스인들에게 깊은 감명을 줬다. ‘한·불 상호 교류의 해’에 이뤄진 이번 박 대통령의 뜻깊은 프랑스 국빈방문이 특별한 우호 관계의 역사를 공유하는 두 나라가 ‘21세기 포괄적 동반자 관계’를 구축하는 데 분수령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손우현 한림대 객원교수·전 주프랑스 공사 겸 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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