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달의 예술 - 음악

사소한 이야기의 감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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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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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영
한양대 교수·음악학

둘러보면 어디에나 이야기가 있고 들어보면 어디에나 소리가 있다. 음악은 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늘 우리 주위에 있다. 소리가 반드시 내 안에 들어와 마음을 휘저어 놓고 나갈 필요는 없다. 인생을 진지하게 묻지 않는다고 이야기가 아닌 것은 아니다. 때로는 사소한 소리, 평범한 이야기가 그립기도 하고 그것이 잔잔히, 그러나 더 오랫동안 마음을 움직이기도 한다.

이자람의 ‘이방인의 노래’

이자람이라는 좋은 소리꾼 이야기를 진작에 들었다. 이제야 인연이 닿아 그의 소리,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지난달 1일, 서울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였다. 그가 들려준 이야기는 ‘이방인의 노래’였다. 이리저리 뜯어보자면, 이번 이야기는 좀 이상한 것이다. ‘이방인의 노래’는 우리나라 전통 판소리에 기대고 있는데, 그가 들려준 이야기는 콜롬비아 소설가 마르케스의 단편 ‘대통령 각하, 즐거운 여행을(Bon Boyage, Mr. president!)’에 바탕을 두고 있다. 판소리는 소리꾼과 고수의 소리로 이루어지는데 이번 이야기에는 여기에 기타 연주자까지 가세했다. 서로 다른 문화, 장르, 악기가 어울릴까 하는 염려가 생길 만도 하다. 그러나 정작 이자람의 걱정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거창한 장르 결합이나, 각기 다른 문화의 융합이나, 전통음악과 서양악기의 조화 같은 것이 아니라 그저 자기 마음의 미세하고 잔잔한 울림이 청자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질까 하는 것이었다.

이야기 자체는 심심하다고도 할 수 있다. 남미의 가난한 어느 전직 대통령이 투병차 제네바에 오게 되고, 그곳에 살고 있던 그 나라 이주민 부부가 그를 이용해 돈을 벌려고 하다가 점차 그와 정이 들게 된다는 이야기다. 별다른 극적 사건도 없고, 생의 진리를 새삼 만나게 될 만한 기발한 사고 전환도 없다. 토닥거리며 일상의 소리를 내던 주인공들이 어느샌가 서로에게 귀 기울이게 되고 공감하게 되며, 그러니 정들게 된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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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의 지평을 넓혀가고 있는 이자람. 외국문학과의 만남도 적극 시도한다. [사진 서울 예술의전당]

이자람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때로는 깔깔대며 웃게도 하고 때로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슬쩍 닦게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시종일관 조용하게 이야기하려고 애썼다. 대통령이 수술실에 들어가는 장면에서 부른 ‘이른 아침’이라는 노래, 이주자 부인이 불러주던 자장가, 대통령과 헤어지는 장면에서 부르는 ‘잘가요’는 모두 어쩌면 감정을 그득 담아 마음을 휘저을 수 있는 장면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부분에서조차 담담했다. 뜨거운 환호보다도 더 오래도록 가슴을 흔드는, 잔잔한 마음의 울림이었다.

둘러보면 어디에나 이야기가 있고 들어보면 어디에나 소리가 있다. 그러나 그 이야기나 소리가 항상 우리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그 이야기와 소리에 민감하게 귀 기울이고,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로 만들며 우리 마음에 잔잔히, 오래도록 남을 수 있는 소리로 바꾸어 놓는 좋은 예술가가 있어야 한다. 그 순간 ‘이방인의 노래’는 어느새 나의 노래가 된다. 그것이 예술가의 힘이고 좋은 예술의 신비다.

정경영 한양대 교수·음악학